토혈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우신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6일 (월) 22:35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1924 동아일보에 출간된 단편소설

줄거리

'나'는 늙고 병든 어머니와 병석에 누워있는 처, 3살배기 어린 딸 몽주를 먹여살려야 하는 고충으로 힘들어한다.‘나’는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을 불러 진찰받고, 백원을 주면 아내의 병을 고쳐주겠다는 의원에 말에 그러겠다고 승낙한다. 의원의 처방을 받고 약국에 간 ‘나’는 돈을 주지 않으면 약을 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았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온 어머니를 발견한다. 뒤에서 보를 들고 쫓아온 김은 수남촌에 갔다가 어머니가 개에게 물리면서도 보자기에 싼 것을 꼭 안고 있었다고 말했고, 보자기에서는 이삼 승의 좁쌀이 나온다. 고달픈 현실에 괴로워하던 ‘나’는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한다.

작품 특징

토혈은 기아와 살육으로 개작되었는데 인물 및 배경설정, 주인공의 가난과 반항, 환상적 장면의 등장과 복선, 문제해결 방식을 볼 때 최서해 소설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문

[토혈]

이월의 북국에는 아직 봄빛이 오지 않았다. 오늘도 눈이 오려는지 회색 구름은 온 하늘에 그득하였다. 워질령을 스쳐오는 바람은 몹시 차다.

벌써 날이 기울었다. 나는 가까스로 가지고 온 나뭇짐을 진 채로 마루 앞에 펄썩 주저앉았다. 뼈가 저리도록 찬 일기건마는 이마에서 구슬땀이 흐르고 전신은 후끈후끈하다. 이제는 집에 다 왔거니 한즉 나뭇짐 벗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나는 여태까지 곱게 먹고 곱게 자랐다. 정신상으로는 다소의 고통을 받았다 하더라도 육체의 괴로운 동작은 못 하였다. 그런데 나는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다. 아버지는 내가 아직 강보에 있을 때에 멀리 해외로 가신 것이 우금(今) 소식이 없다.

그러니 나는 이때까지 어머니 덕으로 길리었다. 어머니는 내가 외아들이라 하여 쥐면 꺼질까 불면 날을까 하여 금지옥엽같이 귀여워 하셨다. 또 어머니는 여장부라 할 만치 수완이 민활하여 그리 큰 돈은 못 모았어도 생활은 그리 군졸(出)치 않았다. 그래 한닙 두닙 모아서 맛있는 것과 고운 것으로 나를 입히고 먹였다. 나는 이렇게 평안하게 부자유가 없이 자라났다. 이렇게 나뭇짐 지는 것도 시방 처음이다. 지금 입은 이 남루한 옷은 이전에는 보기만 하였어도 나는 소스라쳤을 것이다.

지금 우리 집 운명은 나에게 달렸다. 여러 식구가 굶고 먹기는 나의 활동에 있다. 어머니는 늙었다. 백발이 성성하시다. 민활하던 그 수완도 따라서 쇠미(表)하였다. 나는 처도 있다. 금년에 세 살 되는 어린 몽주(夢周)도 있다. 그런데 나의 처는 병석에서 신음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까지 직업을 얻지 못하였다. 생소한 이곳에서 도와주는 이조차 없다. 내 생활은 곤궁하다. 나를 사랑하여 별별 고생을 다 하시고 길러 주신 어머니를 내가 벌게 된 오늘날에 이르러 차디찬 그 조밥이나마 배부르도록 대접지 못한다. 더욱 병석에서 신음하는 나의 처, 냉돌(合)에 홀이불 덮고 누워 있는 그에게 약 한첩 따뜻이 못 먹였다.

소위 우리 집의 가장이라는 나는 아무 수입 없는 나는 헐벗고 못먹고 신음하는 어머니와 처자를 볼 때나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고 쓰려서 차마 머리를 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네들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마루 앞에 나뭇짐 놓는 소리를 듣고 몽주가 뚫어진 문구멍으로 내다보더니

“아빠” 하고 부른다. 그리고 반가운 듯이 문을 탁탁 친다. 머루알같이 까만 눈-그 귀여운 웃음을 띤 어글어글한 눈이 창구멍으로 보인다. 그 모양을 보는 나는 잠깐 온갖 괴롬과 설움을 다 잊었다. 알지 못할 아름다운 사랑을 느꼈다. 이때에 어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내다 보신다. 흐르는 광음을 설명하는 늙은 낯에는 모든 괴롬과 근심의 암운(暗)이 돌았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칼로 쪽쪽 찢는 듯하다.

“인제야 오니..…. 배고프겠구나."

어머니는 괴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말씀하신다.

"괜찮아요. 아침을 많이 먹었더니......"

나는 가장 쾌활스럽게 괴롭지 않은 듯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실상인즉 배가 고팠다. 나는 나뭇짐을 벗었다. 땀이 배인 의복에서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시듯한 땀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꽁무니에 질렀던 낫을 뽑으면서 부엌에 들어섰다.

양기(陽氣)가 잘 들지 않는 방이요. 바깥 날이 흐렸고 벽이며 창이 연기에 그을러서 어둑하고 유울(A)한 실내의 공기는 십분 불쾌하였다. 나는 서양 소설에서 읽은 비밀 지하실을 상상하였다.

몽주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바지를 잡아 끈다. 똥똥하던 낯이 가죽만 남아 파랗게 된 처는 부뚜막에 고요히 누웠다가 쌍거풀진 눈을 힘없이 떠서 나를 보더니 다시 스르르 감는다. 미미한 호흡은 괴로운 듯이 급하다. 나는 창 곁에 몽주를 안고 앉았다. 어머니는 병처(內)의 곁에 앉았다. 몽주는 나의 조끼 단추도 만져 보고 호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끄집어내었다가는 끄집어내이면서 나를 방긋 웃는다. 죄 없는 그는 늘 웃으나 나는 가슴이 뿌듯하였다. 치마 하나도 없어서 차디찬 냉방에서 온 겨울 아랫도리를 벗고 지낸 어린 몽주를 볼 때마다 나는 눈물이 솟았다. 아아 과연 내가 남의 아비 노릇할 자격을 가졌는가? 나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목구멍에서 연기가 핑핑 돈다. 소리를 크게 쳐서 통곡을 하고 싶다. 나는 그만 몽주를 어머니에게 보내고 목침을 베고 누웠다. 눈을 꼭 감았다. 배가 아프다. 나는 수년 되는 복통이 지우금(至今) 낫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픈 모양을 보이지 않았다. 악독한 마귀가 염염한 화염을 우리 집으로 향하여 뽑는다. 집은 탄다. 잘 탄다. 우리 식구도 그 속에서 타 죽는다. 나는 몸살을 치며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한 환상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머리맡에 있는 오랜 신문을 집어들고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의식 없이 읽었다. 온갖 생각이 뒤숭숭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신문으로 낯을 가리우고 눈을 감았다. 처의 신음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모두 죽었으면 시원하겠다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어머니도 죽고, 처도 죽고, 몽주도 죽고……. 만일 그렇다 하면 그 모든 시체를 땅에 넣고 돌아서는 나는 어찌 될까? 모든 짐을 벗었으니 자유롭게 행동할까? 아! 아니다. 아니다. 그네들도 사람이다. 생을 아끼는 인간이다. 그네의 생명도 우주에 관련된 생명이다. 내가 내 생을 위한다 하면 그네들도 나와 같이 생을 석(情)할 것이다. 그네들도 인류로서의 권리가 있다. 왜 죽어? 왜? 죽으라 해? 나는 부지불식간에 주먹을 부르쥐었다.

"여보!"

새어 내리는 소리로 처가 부른다.

"왜 그러우…."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낯을 찌푸리고 귀찮은 듯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처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 짜증에 그런 것이다.

처는 나의 거친 대답을 듣고 나의 불평스러운 낯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만 눈을 감는다. 감은 그 눈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른다. 내 간장은 천 갈피 만 갈래로 찢어지었다. 내가 왜 짜증을 내었나? 병 구완도 바로 못 하는 그를 내가 왜 마음이나 편하게 못 해 주나! 나는 후회와 측은한 감정이 가슴에 넘치었다.

나는 처의 곁으로 가서 그의 팔을 주물렀다. 그의 사지는 온통 뒤틀리고 줄어붙는다. 또 풍증이 이는 것이다. 그는 퍽 괴로운 모양이다. 그 이마에서는 진땀이 빠직빠직 돋는다. 호흡은 급하였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여보' 하고 불렀다. 그는 혀가 굳어서 대답은 못 하고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감는다. 그 두 눈에는 혈조(血湖)가 빨갛게 올랐다. 처의 다리를 주무르던 어머니는 흑흑 느껴 우신다.

"너를 죽이는고나! 너를...…. 약 한첩 바로 못 쓰고 너를 죽이는고나.….…."어머니는 한탄하신다. 철없는 몽주는,

"엄마, 엄마.”

하면서 젖 먹으려고 인사불성의 어미 가슴에 기어오른다. 나도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어쩌면 좋을까?

"얘 의원을 보이고 약이나 좀 써 보았으면 원이나 없겠구나! 어디 좀 가서 사정이나 하여 보아라."

어머니는 울음 절반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아무말도 없이 일어섰다. 날은 벌써 저물었다. 이집 저집에서 나는 석연(空)이 솟는다. 바람은 점점 차진다.

나는 의원을 불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