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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8일 (수) 00:44 판




















개요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고종 16년인 1879년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숙영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님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만해라는 법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14살이 되던 해에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고, 결별하구서 훗날 유숙원과 결혼했고, 자녀는 한보국과 한영숙을 두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서 활동했으며, 대표작으로는 님의 침묵이 있다.

생애

출생과 성장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여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9세 때는 문리를 통달하여 16세의 나이에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한응순과 어머니 방숙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집안 형편이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형인 한윤경이 토지를 마련했지만, 이마저도 한용운이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그는 14세때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했고, 이들 사이에는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했다고 한다.


청년기

1894년 동학농민군에 가담을 했으나, 아버지가 농민군 토벌에 참여를 하셔서 대립을 했다고 한다. 그 후 1895년 고향을 떠나 1896년 오세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머슴살이를 하며 불교의 기초지식을 쌓았고, 학문적으로 관심이 많아 대장경을 열람한 뒤, 1896년 하산하여 시베리아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1876년 처가에 귀가해 2년간 은신하다가 출가했다.


대한제국기 활동

그는 출가 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을 은사로 하여 득도한 후 전영제에게 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은 뒤 계명을 봉완, 법호는 만해라 하였다. 이 후 그는 불교 서적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적들을 수용하며 근대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의 설립에 참여하고,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 후 1910년 그는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했으며, 조선 불교 유신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승려의 결혼 자유화의 진성서를 올렸는데, 부처님이 결혼을 금지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란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활동

불교의 단합화를 위한 만해의 활동

1910년 12월 한일 불교 동맹을 반대철폐하고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 김진응, 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저지했다. 그리고 1914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초대되어 교편을 잡았고, 조선 불교 청년 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다. 그리고 이 해에 불교대전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때 이후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교단, 종단간의 갈등 완화 및 협력을 주장하는 선교진흥론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한글로 불교경전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불교 포교에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 후 1913년 그는 박한영외의 몇몇 사람과 조선불교 종무원을 창설했고,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이 후 정선강의 채근담을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하였으며,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18년 11월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였다. 그는 여기에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였으며, 불교의 홍보,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었다. 그리고 1931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개칭하여, 불고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 홍보에 온 정력을 기울이고 청년 법려 비밀 결사인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결국 1933년 권상로에게 잡지사는 다시 재인수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

그는 1918년 12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했다. 이 당시 그는 평화 시위가 격하되어, 고문이 두려워 자수하려는 민족 대표 33인의 머리에 인분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는 수감되어있을 당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지만,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상해에 전달되었다 이 후 1919년 11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발표되었다. 1922년 5월 그는 출옥했으며,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는데, 청중들이 극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이후 1922년 9월 잡지 개벽에 옥중시 ‘무궁화를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이 후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를 결성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1928년 그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재임되고서 경성지회 회장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뢰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1940년 5월 창시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생애 후반

말년에 그는 중풍으로 생계가 어려워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회, 김성주, 만공 등 지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생활했다. 그리고 영양실조와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사망하였다.

연대기

1879년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에서 아버지 한응준, 어머니 방숙영의 차남으로 출생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득도
1909년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1910년 한일불교동을 반대철폐 및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들과 독립운동 협의
1914년 『채근담』 저술,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1917년 조선불교회 회장 취임
1918년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 발행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소
1926년 님의 침묵〉 발표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연재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

작품 목록

한시 시(님의 침묵 시집 수록) 기타 시 시조 소설 단행본
1. 영호 화상에게 만나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함 1. 님의 침묵 1. 心 1. 尋牛在 흑풍」, 《朝鮮日報》, 1935.4.9~1936.2.1.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불교서관. 1913
2. 완호 학사를 보내며 2. 이별은 미의 창조 2. 一萃艸의 生命 2. 還家 「後悔」(50회 연재중 폐간), 《朝鮮中央日報》, 1936. 『불교대전(佛敎大典)』, 범어사, 1914
3. 만화 화상을 대신하여 임향장을 조상함 3. 알 수 없어요 3. 가갸날에 對하야 3. 禪友에게 「鐵血美人」, 《新佛敎》 1~2호, 1937.3.~4. 『정선강의(精選講義) 채근담(菜根譚)』, 신문관(新文館), 1917
4. 가을밤의 비 4. 나는 잊고저 4. 成佛과 往生 4. 早春 「薄命」, 《朝鮮日報》, 1938.5.18~1939.3.10. 『十玄談註解』, 法寶會, 1925.6.7
5. 선방의 뒷동산에 올라 5. 가지 마서요 5. 聖誕 5. 春畵 「三國志」, 《朝鮮日報》, 1939.11.1.~1940.8.11.
6. 피난 도중 비에 갇혀 머물면서 6. 고적한 밤 6. 비바람 6. 襌境
7. 석왕사에서 영호·유운 두 스님을 만나 두 수를 지 7. 나의 길 7. 반달과 小女 7. 秋夜短
8. 영호 화상과 함께 유운 화상을 찾아갔다가 밤길을 같이 돌아옴 8. 꿈 깨고서 8. 山村의 여름 저녁 8. 春朝
9. 산가의 새벽 9. 藝術家 9. 歲暮 9. 코스모스
10. 본 대로 느낀 대로(1) 10. 이별 10. 淺日 10. 漁翁
11. 한적 두 수 11. 길이 막혀 11. 山居 11. 男兒
12.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함(1) 12. 自由貞操 12. 산골 물 12. 成功
13. 고향 생각(1) 13. 하나가 되어주셔요 13. 矛盾 13. 秋花
14.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함(2) 14. 나룻배와 행인 14. 쥐 14. 織業婦人
15. 풍아에서 주자가 동파의 운을 써서 매화를
읊은 것을 읽고 나도 그 운을 사용하여 매화를 노래함
15. 차라리 15. 日出 15. 漂娥
16. 또 옛 사람들이 매화를 두고 오언고시를
쓴 일이 없기에 호기심으로 시험삼아 읊어 봄
16. 나의 노래 16. 海村의 16. 秋夜夢
17. 새벽 17. 당신이 아니더면 17. 江배 17. 漢江에서
18. 영호 화상의 향적봉 시에 차운함 18. 잠 없는 꿈 18. 落花 18. 사랑
19. 스스로 고민함 19. 生命 19. 一萃草 19. 우리 님
20. 스스로 즐거워함 20. 사랑의 測量 20. 모기 20. 無題 一四 수
21. 달 구경 21. 眞珠 21. 파리 21. 無窮花 심으과저
22. 연말에 차가운 비가 내림을 보고 느낌이 있기에 22. 슬픔의 삼매
23. 한가히 노닐며 달을 보고 23. 의심하지 마셔요
24. 달이 돋으려 할 때 24. 당신은
25. 달이 처음 뜰 때 25. 행복
26. 달이 하늘 한가운데 올 때 26. 錯認
27. 달이 지려 할 때 27. 밤은 고요하고
28. 본 대로 느낀 대로(2) 28. 秘密
29. 고향 생각(2) 29. 사랑의 存在
30. 고향을 생각하는 괴로움 30. 꿈과 근심
31. 스스로 시벽을 웃음 31. 葡萄酒
32. 청한 32. 誹謗
33. 바람과 눈을 막고자 안팎의 문틈을
모두 바르고 책을 보다가 장난삼아 시 두 수를 지음
33. 「?」
34. 홀로 앉아 34. 님의 손길
35. 동지 35. 海棠花
36. 눈 내린 새벽 36. 당신을 보았습니다
37. 고의 37. 비
38. 한가히 읊음 38. 복종
39. 유운 화상의 병들어 누움에 대한
상심과 더불어 고향 그리는 마음
39. 참아 주셔요
40. 추운 계절인데도 옷이 안 오기에
장난삼아 지어 봄
40. 어느것이 참이냐
41. 본 대로 느낀 대로(3) 41. 情天恨海
42. 눈 온 뒤에 한가히 읊음 42. 첫 키스
43. 병의 시름 43. 禪師의 說法
44. 한가함 44. 그를 보내며
45. 병을 읊음 두 수 45. 金剛山
46. 홀로 읊음 46. 님의 얼굴
47. 나그네의 회포 47. 심은 버들
48. 새벽 경치 세 수 48. 樂園은 가시덤풀에서
49. 밤에 혼자 두 수 49. 참말인가요
50. 본 대로 느낀 대로 50. 꽃이 먼저 알아
51. 회포를 읊음 51. 찬송
52. 높은 네에 오름 52. 論介의 愛人이 되어서 그의 廟에
53. 출정 군인 아내의 슬픔 53. 後悔
54. 산중의 한낮 54. 사랑하는 까닭
55. 멀리 생각함 55. 당신의 편지
56. 본 대로 느낀 대로(5) 두 수 56. 거짓 이별
57. 외로이 떠돎 두 수 57. 꿈이라면
58. 내원암에 모란나무 오래된 가지가
있어서 눈을 받아 꽃이 핀 것 같기에 읊음
58. 달을 보며
59. 영호·유운 두 선백과 밤에 읊음 두 수 59. 因果律
60. 백화암을 찾아감 60. 잠꼬대
61. 시모노세키 馬關의 배 안에서 61. 桂月香에게
62. 미야지마宮島의 배 안에서 62. 滿足
63. 아사다 교수에게 화답함 63. 反比例
64. 갠 날을 읊음 64. 눈물
65. 비오는 날 홀로 읊음 65. 어디라도
66. 동경의 여관에서 매미소리를 듣고 66. 떠날 때의 님의 얼굴
67. 나비 67. 最初의 님
68. 맑은 새벽 68. 두견새
69. 봄 꿈 69. 나의 꿈
70. 조동종대학교 별원에서 읊은 두 수 70. 우는 때
71. 고의(2) 71. 타골의 詩를 읽고
72. 증상사 72. 수의 비밀
73. 고향을 생각하는 밤에 빗소리를 듣고 73. 사랑의 불
74. 지광선백에게 화답함 74. 「사랑」을 사랑하여요
75. 닛코日光로 가는 도중 75. 버리지 아니하면
76. 닛코日光의 남호 76. 당신 가신 때
77. 홀로 있는 방에서 비바람 소리 듣고 77. 妖術
78. 들길을 가면서 두 수 78. 당신의 마음
79. 가을밤에 빗소리를 듣고 느낌이 있어서 79. 여름밤이 길어요
80. 가을 새벽 80. 冥想
81. 영호 · 금봉 두 선사와 시를 지음 81. 칠석
82. 중, 금봉 두 선사와 만나 함께 읊음 두 수 . 000 82. 생의 예술
83. 서울에서 영호·금봉 두 선사를 만나 함께 읊음 두 수 83. 꽃싸움
84. 소일 84. 거문고 탈 때
85. 양진암에서 봄을 보냄 85. 오셔요
86. 양진암 86. 쾌락
87. 맑음 읊음 87. 苦待
88. 구름과 물 88. 사랑의 끝판
89.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에게 줌 두 수 89. 讀者에게
90. 선암사에서 앓고 난 뒤에 두 수
91. 향로암에서 밤에 읊음
92. 금봉선사와 밤에 읊음
93. 선암사에 머물면서 매천의 시에 차운함
94. 향로암에서 느낀 대로 씀
95. 영산포의 배 안에서
96. 지는 매화를 보고 느낌이 있어서
97. 범어사에서 비가 온 뒤에 생각을 말함
98. 봄 안방의 슬픔
99. 장마가 갬
100. 어부의 피리소리
101. 파릉 고기잡이의 뱃노래
102. 안해주
103. 황매천
104. 화엄사에서 산보하며
105. 구곡령을 지나며
106. 산가의 흥취
107. 약사암 가는 길에
108. 구암사의 초가을
109. 회포를 말함
110. 구암폭
111. 구암사에서 송청암 형제와 같이 읊음
112. 쌍계루
113. 남형우에게 춤
114. 송청암에게 춤
115. 서울에서 오세암으로 돌아와 박한영에게 보냄
116. 중양
117. 정사년 12월 3일 밤 10경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인가를 떨구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씻은 듯 풀렸다. 이에 한 수를 지음
118. 오세암
119. 어느날 이웃방과 이야기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두 손을 2분 동안 가볍게 묶 이었다. 이에
120. 즉석에서 읊음
121. 옥중의 감회
122. 어느 학생에게 줌
123. 가을비
124. 가을 회포
125. 눈오는 밤
126. 벚꽃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127. 기러기를 읊음 두 수
128. 병감의 후원
129. 고우에게 주는 선화
130. 다듬이 소리
131. 등불 그림자를 읊음
132. 송별
133. 한강
134. 눈 오는 밤 그림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135. 무제(1) 여덟 수
136. 무제(2) 두 수
137. 신문 폐간
138. 회갑 날의 즉흥
139. 삼가 계초 선생의 생신을 축하함
140. 무제(3) 두 수
141. 곽암 십우송을 차운하다

한용운의 문학적 가치

작품 활동

그는 본격적으로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으며,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 조선인의 번민’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26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해,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 해에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했다. 그는 이 ‘님의 침묵’에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써 검열을 피하면서도 민족정신과 민족의 현실과 이상에 관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후 1933년에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조선일보에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그리고 1936년엔 장편 ‘후회’를 연재했다. 그리고 1938년엔 장편 ‘박명’을 발표하였으며, 이 외에도 신인문학과 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을 발표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에 중편소설‘ 죽음’을 발표하였다.

작품성

한용운의 시는 그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스님으로서 살아왔고, 이를 아름답고도 자연스럽게 문학에 녹여내었다. 그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고도의 은유와 역설법을 구사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들을 적었다. 또한, 그 당시 조선의 시조에 얽매이지 않는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으며, 정형적인 틀을 벗어나면서도 리듬감을 갖춘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해 자유시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시에 토속적인 표현과 방언을 사용함으로서 세속적이면서도 진부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썼다.

관련 인물

  • 김연곡

한용운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월 26일 백담사에서 김연곡을 스승으로 득도하였다.

  • 전영제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전영제에 밑에서 수계하였다.

관련 장소

만해 기념관

지도를 불러오는 중...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792번길 24-7

만해기념관1.jpeg 만해기념관2.jpeg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은 1981년 성북동 심우장(전보삼 관장)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1990년 남한산성으로 이전하여 재개관하였다. 대지 약 1,700㎡, 연건평 400㎡, 지상 2층의 규모로 종합전시실과 교육관·세미나실·자료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약 8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만해의 출가와 수행,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 활동, 문학 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다.

대표 소장품으로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의지를 내걸고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원전을 비롯해, 《세계지리》·《영환지략》·《음빙실문집》 등의 책, 한용운의 유묵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각종 판본, 1962년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구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만해기념관의 정원은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조각된 만해 시비와 만해 조각상, 무궁화로 꾸며져 있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애국지사 특별전>, <우국시인 3인전> 등 다양한 기획전시를 개최하였고,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인 <문화가 있는 날_우국시인의 나라사랑과 나의 미래훈장>, <애국시와 함께하는 캘리그라피>, <길 위의 인문학_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따라 알아보는 우리 역사&문화>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 받았다.

2020년 만해기념관은 상설전시 및 <우당 유창환과 일창 유치웅 부자 특별전>, <고당과 창석>, <애국지사 만해 한용운> 등 4~6 회의 기획전시가 꾸려질 예정이며, 상설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가 있는 날_만해, 그리고 나의 NIM>, <청소년 문학 증진_문학에 풍덩 빠지다.> 등의 기획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만해기념관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역사와 유적을 바탕으로 지역 문화 중심의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경기도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복합 문화 쉼터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이다.

만해기념관 링크

한용운 선생 생가지

지도를 불러오는 중...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성곡리)

한용운 생가.jpg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부터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생가인 초가 외에 사당·삼문·관리사·화장실 등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인제 만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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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인제군 북면 만해로 91 만해수련원

만해마을.jpg


내설악의 맑은 물이 흐르는 만해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다.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 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때 민족 혼을 불어넣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려 만든 수련장이다. 청소년과 대학생 수련, 기업 연수, 가족 휴양에 적합한 숙박 시설과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만해문학박물관을 비롯하여 문인의 집, 만해학교, 심우장, 서원보전, 님의침묵 광장, 님의침묵 산책로가 있다.

특히, 2004년에 문을 연 문인창작집필실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곳인데 문예진흥원에서 숙식비 전액을 지원한다. 최장 4개월을 머물 수 있는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문인들은 창작이나 집필에 몰두하거나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소설가 박경리 씨가 운영하는 토지문화관은 모든 예술인에게 시설을 제공하나, 이곳은 문인들에게만 개방한다.

만해마을 홈페이지

기타 자료

관련 논문

한용운사상연구 : 만해사상연구회편 - 서문. 김용구.[1980].(vol1) KISS 링크

만해 한용운의 자유사상  : 독립운동에 나타난 자유의지.이영무.[1994].(vol4) KISS 링크

한용운 시의 '숭고' 연구.한용국.[2017].(NRF) 기초학문자료센터 링크


관련서적

한용운을 읽다 : 기룬 님을 좇아가는 삶의 나침반 같은 시 (2021) 전국국어교사모임[휴머니스트]

한용운 - 3.1 운동 100주년 기념 (2019) 한용운 [다옴길]

한용운문학연구4판 (1982) 김재홍 [일지사]


관련영상

  • 국가보훈처에서 개재한 한용운 영상

  • 만해 선사 입적 76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 [기억록] 비와이, 한용운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 [삼일절특집] 이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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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한용운 만해 A는 B라는 호를 가졌다
한용운 심우장 A는 B에 거주했다
한용운 심우장 A는 B에서 별세했다
한용운 독립운동가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시인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승려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서예가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3.1운동 A는 B에 가담했다
한용운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가담했다
한용운 신간회 A는 B에 속했다
한용운 민족대표33인 A는 B에 속했다
한용운 조선불교회 회장 A는 B였다
한용운 님의 침묵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흑풍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알 수 없어요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행복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A는 B를 발표했다
한용운 채근담 A는 B를 저술했다
이학암 한용운 A는 B의 스승이다
전영제 한용운 B는 A 밑에서 수계하였다
조선독립의서 상하이 임시정부 A는 B로 전달되었다

참고자료

한용운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853

한용운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5300&code=kc_age_40

한국현대문학 위키 -한용운 http://ko.kliterature.wikidok.net/wp-d/5bf79683ef6f47fc0c2af5dd/View

박현수(2014), 「만해 문학의 문학사적 가치」, 『만해 용운스님 70주기 추모특집』 vol16.한국불교선리연구원.

기여자

느낌있조

강서연

박민선

송영찬

송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