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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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릉동에서 자라고 돈암동(현 동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비밀결사 대동단[1]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인 김가진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 관여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해방 후 돈암동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전쟁 때 납북되었다. 임시정부 요인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던 정정화가 아내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자동이 그의 외아들이다.
김자동의 구술 증언에 의하면, 이들 가족은 해방 이후 돈암동 178-1번지(현 동선동 3가 130-7)의 한옥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아버지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1928년 6월 상하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 재정위원으로 활동.

1932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가

1934년 1월 이동녕·김구·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 뤄양군관학교분교[洛陽軍官學校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

1940년 5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담당.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 정착한 뒤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

1943년 8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아 활동.

1945년 6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

생가(집터)

김의한, 정정화 집터.jpg
참고:주거지[2]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3가 130-7

당시의 집 주소는 돈암동 178-1번지였고, 성신여자고등학교 앞쪽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은 성신여자고등학교 아래 동선동 주민센터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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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성북아카이브[4],주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