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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은 열린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와 역사가 가득한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성북동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 담긴 주거지라고 생각했다.

성북동 한옥 밀집 지역

앵두마을, 선잠단지

한옥 밀집지역.jpg

앵두마을은 한옥 38동, 비한옥 131동이 자리하고 있으며 선잠단지는 한옥 20동, 비한옥 24동으로 이루어져있다.

  • 선잠단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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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에 한옥이 많은 이유
성북동에는 앵두마을과 선잠단지처럼 한옥 밀집 지역이 남아있으며 밀집지역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옥을 종종 볼 수 있다. 왜 성북동에는 한옥이 많은 걸까?
과거 성북은 한양에서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물자가 오갔으며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였기에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병졸들이 무예를 익히는 연무장이 있었으며 도성을 지키는 군대를 설치했다. 군대와 함께 성북동에서 살도록한 민간인들도 있었는데 그 당시 성북동은 호랑이도 나온다는 산지였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힘들어서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성북동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왕자들과 유명한 문인과 화가들이었다. 
성만 넘으면 산과 계곡이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사냥터이자 쉼터로 안성맞춤이었다.이러한 이유로 성북동에는 한옥이 즐비하게 된 것이다.

북정마을

북정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세기 천주교 박해때 교인들이 숨어 살았으며 일제감정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 모여든 기생, 가난한 예술가들의 생활 공간이 되기도 했고 1960년대 산업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살았다. 재개발 대상지역이었으나 지금은 1970년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로 알려지게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북정마을 할머니 경로당.jpg 북정마을 카페.jpg

  • 북정마을 이름의 유래

조선시대에 궁중에 바치는 매주를 쑤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콩 삶는 소리로 마을이 북적북적했다는 것에 유래되었다.

  • 북정마을 가는 방법

한성대 입구역에서 성북 03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북정마을이다. 북정마을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걸어서 올라가는 것보단 버스를 이용해야한다.

  • 북정마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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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북정마을에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의 가택인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은 볕이 잘 들지 않는 북향으로 지어져있다. 일반적인 한옥의 모습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남향으로 지어진 조선 총동부와 마주보고 살 수 없다는 한용운 선생님의 독립정신에 의한 것이다.싱우장은 1985년 7월 5일 서울시 지정 문화재 기념물 7호, 2019년 4월 8일 사적 제 559호로 승격하여 지정되었다.

  • 심우장 이름의 뜻

한용운 선생님은 독림운동가이자 시인이었으며 승려였다. 승려였던 한용운 선생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에서 이름을 따왔다. 불교에서는 소가 마음을 상징한다. 심우, ’소를 찾는다' 즉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심우장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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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200px).jpg[1]

만해 한용운 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북구의 예술가,성북구의 주민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광섭시인

북정마을은 1969년 김광섭 시인이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지이다. 1960년대 산업화로 인한 도시 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북정마을에 모여사는 사람들을 비둘기로 비유했다. 북정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비둘기 상징물을 많이 볼 수 있고 비둘기 공원도 있다. 성북동에는 김광섭 집터도 있다. 지금은 집이 허물어지고 빌라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집터

김의한, 정정화

독립운동가 김의한, 정정화가 해방된 이유 거주했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가 돈암동에 있다. 성신여자 고등학교 아래 동선동 주민센터 부근일 것이라고 한다.

김의한, 정정화 집터.jpg [2]

차미리사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알리고 많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썼다. 차미리사 선생의 집터는 현재 행정구역이 바뀌어서 정확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지만 추정 지역의 사진이 있다.

차미리사 집터.jpg [3]

김현국

김현국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는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그는 현 주소로는 안암정 86-11번지에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김현국 집터.jpg

[4]

백매수

성북동 58-18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작고하였다. 백매수 선생의 집터에는 한옥이 남아있다.

백매수 집터.jpg [5]

손용우

손용우 선생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오래된 이용원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거주지 주소는 성북정 133-60이었다.

손용우 집터.jpg [6]

이육사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는 현재 주소로 종암동 62-1번지에 거주하였고 현재는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육사 집터.jpg [7]

임규

임규 선생은 성북동 미륵당 현재는, 성북로 28길 60이라는 곳에서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산고 지필을 미쳤다. 임규 선생은 미륵당에서 한용운을 포함한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류를 논하기도 했다.

최익환

최익환 선생은 성북동 260번지에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현재는 고급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최익환 집터.jpg [8]

정진숙

성북정 177-40번지로 현재 성북로 8길 7에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현재는 오래된 한옥과 상가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진숙 집터.jpg [9]

이강

이강은 별세하기 전까지 성북구 정릉동 재건주택 88호에서 거주하였다. 현재는 정릉 1동 힐스테이트 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사이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강 집터.jpg [10]

독립운동가의 자세한 설명-성북구의 주민, 성북 인디펜던스

예술가 집터

오원 장승업

장승업 선생은 생전 성북로 27번지 혜화문에서 가까운 성북천 옆에 거주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초가집 형태를 띄었으나 현재는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오원 장승업 집터.jpg [11]

서세옥

  • 무송재

화가 서세옥 선생은 성북동 소나무를 보고 성북동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손으로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의미의 무송재를 지었다. 그는 별세 전까지 이곳에서 작업을 했으며 그의 대표작 '인간' 시리즈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무송재.jpg [12]

송영수

조각가 송영수는 성북동에 집과 아뜰리에를 설계하였고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거주하였다. 아뜰리에는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영수아뜰리에1.png

김철주

조각장 김철주는 성북동 종암동 35번지에 거주하였다.

박남옥

우리나라 최초 여성 영화 감독인 박남옥 감독은 논암동에서 거주하였다.

조지훈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이 별세하기 전까지 30년간 거주했던 곳은 현재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앞에서 표지석이 세워져있는데 그의 대표작 '승무'가 새겨져 있다. 성북동에서는 그의 흔적을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시 '낙화'가 새겨져 있는 조형물'방우산장'이 성북동 도로변에 세워져있다. 이곳은 한옥의 처마와 벽, 창살 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디자인 하였고 작은 잔디밭에 의자를 두어 '시인의 생각'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방우산장'은 조지훈 선생이 자신이 머물던 곳을 칭하는 명칭이다. 이는 그가 쓴'방우산장기'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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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작곡가 윤이상이 성북동에서 주거했던 기간은 길지 않지만 그는 조지훈 시인과 우정을 나누며 30대 후반을 행복하게 보낸 곳이다. 그가 머무른 곳은 성북동 128-13번지로 집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윤이상 집터 비석.jpg [14]

김환기

화가 김환기는 부인 김향안 여사와 성북동 274-2번지에 신혼 살림을 차리고 그곳을 수향산방이라고 불렀다. 화가 김환기는 성북동에서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 배우자인 김향안 여사를 만났고 화가이자 미술사학자, 평론가인 근원 김용준을 만났다.김용준과 김환기는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였다. 김용준은 김환기가 결혼은 할때 노시산방을 물려주었고 수향산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곳은 감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수향산방 터에는 여전히 감나무가 남아있다고 한다.

노시산방터.jpg [15]

  • 성북구의 예술가와 성북구를 배경으로한 문학, 예술 작품을 더 알고 싶다면 성북구의 예술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북천의 과거와 현재

현재 성북천에서는 오리나 철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잘 구성되어 있고 중간중간 운동시설이 있어서 주민들이 걷거나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 주민들의 산책로가 되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의 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는 성북천은 현재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성북천 복원 사업으로 성북천의 모습이 많이 들어났지만 삼선교를 지나서 부터는 개천을 덮고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성북천의 일부가 도로 아래에 있다. 성북천의 활기찬 모습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성북천을 복개하고 삼선상가 아파트를 건립했다. 아파크 1층의 상가와 재래시장인 삼선시장은 꽤 큰 규모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2001년 성북천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고 성북천은 활기를 찾았지만 그때의 상가는 사라지고 재래시장도 명성을 잃어갔다. 현재는 술집과 음식점이 성북천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오래된 고물상과 작은 슈퍼가 그 자리에 시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듯 하다.

  • 복원 전 성북천의 모습

성북천 3단계(삼선상가 A,B동구간) 복원 전.png

  • 복원 후 성북천의 2021년 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