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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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명량해전은 1597년 (선조 30년) 정유년 9월16일 명량수도에서 벌어진 대첩이며, 이 사건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기적과 같은 대첩이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 판세를 완전히 뒤집은 대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산도대첩 (59척 격파, 세계 4대해전), 노량해전 (200척 격파, 일본군 철수)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사건이다.
명량해전의 명칭을 '명량대첩'으로 잘못 쓰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명량대첩'이 아닌 명량해전이 올바른 표기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내용

배경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었다. 이후에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해봤지만 크게 패하고 전사하여 수군은 전멸되었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에서는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던 병력은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고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서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했다.


전개

일본수군은 벽파진에서 기습 작전을 전개했지만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수군의 철저한 경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순신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았고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 해남군 문내면)으로 수군을 옮겼다. 명량은 간만(干滿)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대목이라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계획 했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였고 이에 이순신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리고 현자(玄字), 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았다.
소소승자총통.JPG


이때 사용되었던 총통이 2011년 문화재청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명량해전의 해역인 전남 진도군 오류리에서 발견한 소소승자총통이다.


이후에 이순신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 등을 독려하여 적진으로 돌진시켰다. 이때 적선 3척의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올라 격전이 벌였고, 이순신소소승자총통을 쏘아 3척을 불질렀다.

결과

명량해전의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후퇴를 하고자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마침 북으로 올라오던 해류가 점차 남동쪽으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일본 인물이었던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인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러한 상황에 일본수군은 분노하여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소소승자총통과 불화살을 쏘았고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하여 공격함으로써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다. 그리고 일본수군은 후퇴하였다. 이 명량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일본수군의 서해로 진출을 포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관련 자료

영상 자료

영화 자료

명량.jpg
명량

  • '국뽕이 차오르는 명량해전 전투씬 | 뭅뭅픽

YouTube 자료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 해군 133척을 대장선 하나로 싸우던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 #벌거벗은한국사 이순신 편
  •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과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 '전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략적 목표에 충성한 이순신의 군인정신 명량해전│이순신 '명량해전'│임용한의 '전쟁사: 임진왜란'│#골라듄다큐

작성자 및 기여자

디지털과 지식콘텐츠(2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작성자 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