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문인화

문인화.png 문인화2.png 문인화3.png 문인화4.png

정의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 또는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용

문인화는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을 갖춘 상태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준비하여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영감을 받아 즉시 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내적인 면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고, 이와 반대되는 형사(形似 : 사물의 외형을 닮게 그리는 것)를 추구하지 않았다. 문인화에서는 옛 대가들의 필의(筆意)를 방(倣 : 옛 대가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이나 필치를 본받아 그리는 방식)하는 전통이 확립되어 후대에는 옛 대가의 회화 양식 자체가 주제가 되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사의를 중시한 그림은 대개 간략하다. 그러므로 원대 이후의 문인화에는 시 형식의 화제(畵題)를 곁들여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시·서·화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들이 표현 수단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소재는 수묵산수화이다. 그 다음은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총칭인 사군자(四君子)이다. 그 이유는 산수화가 예로부터 도(道)를 체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로 여겨졌고, 사군자 역시 그 상징성으로 인하여 문인들이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군자를 그리는 데 구사하는 필획이 서예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사군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묵포도(墨葡萄)소채(蔬菜)의 스케치 등도 문인화에 자주 등장한다.

형성 및 발전

중국 북송시대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이 사인(士人)과 화공(畵工)의 그림은 각자의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사인지화(士人之畵)’ 또는 ‘사대부화(士大夫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論)을 만들었다. 이후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人之畵)’ 또는 ‘문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명말 동기창(董其昌)을 중심으로 남북종화(南北宗畵) 이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南宗畵)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송시대 사대부화, 즉 문인화의 정신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왕공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림을 그린 예를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남종산수화는 강세황,이인상을 비롯한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적극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인출신 화가들뿐만 아니라 직업화가들까지도 남종산수화풍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문인화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남종산수화는 조선 후기 화단의 중심 화풍이 되었다. 이 마법산수화풍은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에도 적극 활용되었다. 특히 정선은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하였고, 그의 화퓽이 널리 파급됨에 따라 남종화의 보급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 남종화풍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당시 화단에서의 지배적인 위치를 더욱 확고히 했다. 문인화에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사군자,화조화 등도 포함되는데,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과 문인화론의 전래로 문인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남종문인화가는 문인화가들의 기법적 토대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외면적인 형태보다는 정신,사상,철학을 중시하여 독자적인 문인화의 세계를 이룰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인생에 대한 철학과 자연에 대한 섭리를 깨달아 인격과 교양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림을 통하여 그 격조가 우러나온다고 보았다.

관련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