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의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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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

이미선

한줄소개

"누군가는 당신을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것만 당신들이 기억해주면 좋겠다."[1]

이야기

 이미선씨는 1961년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고향인 미아리에 돌아와 약국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사느라 바빴던 그는 2005년 화재사건을 계기로 생매매 여성들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연보랏빛 들꽃을 닮았던 아기 엄마가 여기 온 지 보름 만에 그 사고로 죽었고, 사후처리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뭐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약국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무료 수공예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약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국민일보에 「미아리 서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2013년 동명의 수필집을 발간했다.


최성수

한줄소개

"<고양이 학교>는 김진경의 판타지 동화예요. 그런데 그 동화 속에는 허황한 환상이 아니라 아이들이 앞으로 살가야 할 세계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지요. 그 꿈이야말로, 학교에서 제가 아이들에게 불어 넣어주고 싶었던 미래인 셈이지요."[2]

이야기

 시인이자 시민활동가 게다가 극단 <웃는 고양이> 대표인 최성수씨는 1968년부터 50년 넘게 성북동에서 살았다. 30여년을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다리 꽃 같은 우리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등의 시집과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등을 내기도 했고, 재재작년 연극 <고양이 학교>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퇴직 후 지역 활동가, 기쵝자 및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모임인 ‘성북동천'에서 활동하며, 성북동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성북동을 주민들이 행복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마을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더불어 살게 해준 과거의 이웃

차마리사

한줄소개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3]

이야기

 차마리사 선생은 돈암동(집터)에 거주한 독립운동가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했다. 1879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하고 중국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적인 신식 교육을 접했으며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했다. 이후 1917년 괴국한 후 배화학교의 교사와 사감으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여성 교육의 필요성과 시급함을 깨달은 선생은 3.1 운동 이후 1920년 그 정신을 계승하여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여성 인재 양성을 시작했다.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여성 인재 양성을 시작했다. 조선여자 교육회의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부녀자들이었다. 이런 실천 바탕에 있었던 선생의 당시 시대상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동아일보에 기재된 선생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 중 교육 문제가 가장 크며, 그 중 가장 급한 것은 여성 교육이다.
 종래 계집은 아무 사람다운 값이 없이 살아왔는데, 혹자는 이를 여자의 수치라고 하나 나는 이를 전 인류의 수치라 하겠다.
 수레 두 바퀴 같은 남녀 관계가 종래에는 한쪽으로 치우쳤으니,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다.
 -동아일보 1921.2.21-
 선생은 자신의 신념대로 더 많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개최했고, 1921년에 조선여자교육회를 발전시켜 근화학원을 설립했다. 후에 근화학원은 근화여학당으로 승격됐고, 이는 지금의 덕성여중,고,대학교의 전신이다.
차마리사 선생

진영숙

한줄소개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4]

이야기

 진영숙은 1946년에 태어나 1960년에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던 4.19때 희생된 민주열사이다. 그는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시민들의 저항에 함께 분개하고,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신문 기사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4월 19일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는 편지를 써놓고 데모에 합류하러 나갔다. 당시 도심은 경찰이 장악했으나 성북구 등 외곽 지역은 시위대가 경찰을 압도했다. 시위 대열에 합류해 환성과 구호를 외치며 데모한 그는 결국 그날 저녁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편지는 유서가 되었다. 모교 한성여자중학교에서 묘비를 기증하고 동급생이 졸업하는 1962년 2월,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현재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에 묘가 있다.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위 사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않는군요. 부디 몸건강히 계셔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5]

한용운

한줄소개

“그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6]

이야기

 한용운 독립운동가는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했다. 만세 운동을 위해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고 천도교 지도자들 그리고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경성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했다.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등 지속적인 작품활동으로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과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한용운 독립운동가의 모습

출처

  1. "'미아리텍사스' 약사 이미선씨 "언니들 얘기 들어주는 것 그게 치유"커버스토리"에서 발췌. 원문링크
  2. "학교 퇴직금 탈탈 털어 '고양이 연극' 만든 남자"에서 발췌. 원문링크
  3. 차마리사 선생이 근화여학교(현재의 덕성여자중,고,대학교)의 교훈으로 삼은 말
  4. 진영숙이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 중 일부 발췌.
  5. 동아일보,秘話(비화) 第一共和國(제일공화국) (532) 第(제)18話(화) 4.19革命(혁명)에서 발췌. 원문링크
  6. 시 <비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