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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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

역사

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하여 한양에 수도가 입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을 이루며,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고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마주본다. 한양도성이 능선에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도성 5대 명승지에 이름을 올린 낙산은 조선시대 때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 만큼 풍광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인왕(仁王)·쌍계(雙鷄)·백운(白雲)·청학(淸鶴)을 도성 안의 5대 명승지로 손꼽았는데, 이 중 현재의 이화동에 있던 쌍계동이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다 하여 세 번째로 꼽혔다.[1] 일제는 1920년부터 펼쳐진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동숭동에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했고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립했다. 해방된 뒤에 이곳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의대로 바뀌었다. 해방 뒤에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가 계속되자 서울대 학생들은 권력에 맞서 싸웠고,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면 종로의 교통이 막혀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5년에 흩어져 있던 서울대를 통합해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겼고, 그 뒤 서울대 터는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공원화되었다. 낙산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반대편의 나지막한 언덕으로 보이는 곳이다.

지명 유래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 우유를 담당하는 우유소(牛乳所)라는 기관이 조선 시대에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는데, 낙산 일대에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직영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으로도 불렸다. 낙산의 서쪽 동네는 동숭동이다. 조선 시대에는 낙산 자락에서 잣나무를 많이 길렀다 하여 본래 ‘백동’(栢洞)이라고 불렸는데, 1914년에 일제의 경성부가 동명을 만들면서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네’라고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낙산공원

2002년 6월 12일에 동숭동 산2-10 일대 152,443m2 면적이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산의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으나 서울시의 녹지 확충 계획에 의해 낙산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낙산공원 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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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마당부터 혜화문까지의 한양도성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이다. 길이는 약 1.5km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주변 대중교통

혜화 도보 11분- 2번 출구

창신 도보 23분- 2번 출구

한성대입구 도보 24분- 3번 출구

낙산공원- 도보 1분

돈암제일시장

위치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5가 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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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시간

평일 08:00 - 21:00/ 평일 08:30 - 23:00

특징

-농수산물 원산지표시 모범시장으로 선정

-동서남북으로 문이 하나씩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문화관광형시장, 상설시장으로 입구마다 안심콜 출입관리와 손소독체 배치하여 방역관리

-‘고객선지키기 캠페인’을 통해 편리한 쇼핑환경을 조성

-전통시장의 현금결제 불편함을 최소화하여 매장마다 제로페이 사용가능하고 국민지원금 사용 가능 매장이 있음

-직접 방문뿐만 아니라 온라인 장보기도 가능

-남문에 돈암제일시장 고객편의센터를 운영하고 있어 화장실, 교육실, 도서관 등을 이용할 수 있음

-시장 내 흡연을 철저히 규제해 쾌적한 환경 조성

-과일, 수산물, 떡, 기름&고춧가루, 곡류, 정육, 건어물, 반찬, 밀키트&음식점, 생활 의류&잡화 등 다양한 음식, 물건을 구매 가능

관련 축제

선녀축제

선녀축제.jpg

시장 내 맛집

  • 황해도떡집

SBS 생활의 달인, KBS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 나옴/ 이북식찹쌀떡과 강아지떡이 유명함

황해도 떡집.jpeg

  • 돈암순대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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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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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산

서울시 성북구에 있으며 안암동과 종암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높이는 약 134m이다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산으로서, 안암산 ·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한다. 삼각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끝자락은 보현봉에서 형제봉과 북악터널의 위쪽인 보토현을 거쳐, 328m 봉우리에서 다시 서남방의 북악 지맥과 동남방의 미아리고개 지맥으로 갈린다. 이 동남방 지맥은 정릉(貞陵)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로 이어지며, 다시 표고 134m의 개운산 봉우리를 형성한다.

유래

개운산은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운산(開運山)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개운사(開運寺)라는 사찰이 있어 이름을 따왔다. 개운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데 기여한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처음 이름은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가 정조 때 개운사로 변경하였다.

위치

서울 성북구 종암동 길음역 2번 출구에서 111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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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개운사에는 중앙승가대학교(中央僧伽大學校)가 자리하고 있다. 그 외 고려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가 개운산 자락에 위치한다.

간송미술관

위치

서울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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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시간

현재 수장고 신축공사와 내부 복원공사 준비로 휴관중

개요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서울 성북구 성북로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했고, 1938년 완공되었다.

전형필.png

설립자 전형필

고려 말 학자 채미헌공 전오륜의 16대손이자,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 전영기의 장남으로 1906년 태어났다. 전영기는 현재 종로 4가인 배오개의 상권은 물론, 왕십리 등 서울 일대와 황해도 연안, 경기도 일대, 충남 공주 등지의 농지를 소유한 십만 석 부자였다. 간송은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이후 직계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몹시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다. 이때 한학과 신학문을 넘나들며 서책을 모으고 책 읽기에 몰두했던 체험이 후일 대수장가로 성장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간송은 외종사촌 월탄 박종화가 다녔던 휘문고보를 다녔는데 이때의 스승이 한국 최초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이었다. 간송의 비범함과 웅지를 간파한 고희동은 한학의 대가이며 민족 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 위창 오세창에게 간송을 소개한다. 당시 최고의 감식안이었던 위창은 간송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 간송 전형필의 극적인 문화재 수집담은 오늘날에도 회자되는데 국보 제 68호로 지정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일본인 수장가 마에다 사이이치로로부터 2만원, 당시 기와집 20채의 가격에 구입한 일화,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0년 일제가 그토록 없애고자 했던 ‘훈민정음’을 먼저 발견하고 수집한 일화, 한국전쟁 떄 주요 유물들을 가지고 피란했던 일화, 휴전 후 후진 양성에 힘썼던 일화들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압제가 더욱 심해지고 그들의 세력이 확장 일로에 있었을 때에도, 간송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 암울한 시기에도 심혈을 기울여 민족 문화재를 모아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했고, 대표적 민족사학인 보성학교를 인수하여 후진을 육성한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또한 문화 예술계의 후학 양성에 힘쓰는가 하면, 교육 사업, 장학사업에 힘을 쏟았다.

보화각에서 간송미술관으로

간송은 1934년부터 지금 서울 성북동 초입에 위치한 대규모의 부지를 조금씩 구입하기 시작한다. 이곳을 ‘북단장(北檀莊)’이라 명명한 것은 조선의 왕비가 매해 음력 삼월에 행차하여 뽕나무와 누에고치가 잘 자라도록 기원하던 ‘선잠단(先蠶檀)’의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원래 프랑스 출신의 석유상 플레장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 별장과 부지를 구입한 간송은 본격적으로 미술관 건립을 기획한다. 미술관 건립 이유는 문화재, 고미술을 수집, 보호하는 목적 외에도 우리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간송은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에게 서구식 미술관 건립을 의뢰했다. 간송은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장구한 세월을 견딜 만큼 튼튼하고 우리 문화재와 조화를 이룰 건물이 되길 바랐다. 대공사 끝에 1938년 준공된 이 미술관은 당시 첨단의 서구적 건축이지만 외관장식을 최소화했으며 여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간송이 얼마나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깊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건립 후 전시체제가 더욱 위중해지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미술관다운 전시를 하지 못했다. 광복에 이어 한국 전쟁 때문에 분실된 도서화의 양이 많았지만, 간송은 문화재의 목록을 만들고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간송은 ‘고고미술’이라는 최최의 고미술 연구학회지를 지원하면서 우리 고미술의 체계적인 연구를 독려했다. 1962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간송의 급작스런 서거 이후에 보화각의 기능은 일시 정지되었다. 유족들에게는 간송의 갑작스러운 공백으로 인하여 집안의 사업과 보성학교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5년 장남 성우가 귀국하면서 동빈 김상기, 남운 이혹직, 혜곡 최순우, 삼불 김원룡 등 간송의 지인들과 유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서서히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다. 1966년 장남 성우와 혜곡, 삼불, 초우, 수묵 등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차남 영우가 연구소장으로, 혜곡의 소개로 가헌 최완수가 연구실장으로 영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간송 수장품에 대한 정리와 연구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후 보화각은 드디어 ‘간송미술관’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며, 1971년부터 유물이 일반에 공개된다. 1971년 가을부터 주제에 따라선정된 미술관 전시가 한 해 두 번 개최되었고 이에 맞추어 ‘간송문화’라는 도록겸 연구서가 매해 두 번씩 발행되었다.

주요 전시

겸재(謙齋) 정선의 작품

간송미술관에는 겸재(謙齋) 정선의 작품이 200점 이상 소정되어 있는데,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따라서 ‘겸재전’은 겸재 정선의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물꼬를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다. 이후 간송미술관의 연구진들은 겸재 연구를 주도하고 큰 성과를 거두며 한국회화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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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972년에는 봄가을 두 번에 걸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전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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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973년에는 봄가을에 걸쳐 두 번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전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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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전시회

  • 진경산수화전
  • 조선 남종화전
  • 풍속화전
  • 근대산수화전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시의 주제는 작가 개인보다는 장르를 심도 있게 고찰하는 장르 전시회로 발전하였다. ‘진경산수화전’, ‘조선 남종화전’, ‘풍속화전’, ‘근대산수화전’ 등의 전시회가 그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장르 전시회

  • 간송선생 30주기 특별명품전
  • 보화각 설립 60주년 기념전

90년대 이후의 전시는 장르 중심의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한편 다양한 분야의 장르를 포괄하는 전시회도 병행되었다. 따라서 전문적 성격의 전시와 병행하여 일반 대중의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는 전시회도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1991년 ‘간송선생 30주기 특별명품전’ 이나 1998년 ‘보화각 설립 60주년 기념전’이라는 전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간송미술관의 전시회

2000년대 들어서면서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첫째, 조선시대의 화파 형성과 양식의 변천, 상호 영향 관계에 관하여 심화된 연구와 전시가 줄을 이었다. 둘째, 여태껏 산수나 인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던 장르에 대한 연구 전시도 괄목할만한 부분이다.

주요 소장품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그림, 글씨, 도자, 전적, 석조물 등 문화재 전 분야에 걸쳐 실로 다양하고 방대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