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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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4월 11일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한 임시정부이다.

소개

국내외에서 3·1운동이 전민족운동으로 확산될 때, 독립정신을 집약하여 우리 민족이 주권국민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망명정부는 아니었다. 전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 조직이라는 전제하에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정부)으로서, 또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통할기구로서의 구실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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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하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하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상하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침체적인 분위기였다.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지를 차례로 이동하며 지냈다.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 있는 동안(1940∼1945)에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광복군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활동

국내 곳곳에 지하 행정조직을 갖추기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비밀 통신망 확보를 위해 교통국도 운영했다. 독립공채를 발행해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했으며, 독립신문을 발행해 국내외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초기에는 서구 열강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이에 1919년 4월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파리주재위원부를 설치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이는 강대국의 외면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갈등

임시정부는 이념과 지역에 따른 파벌싸움으로 갈등이 컸다. 독립운동 방법론을 두고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대립했다. 특히 임시정부가 처음 내걸었던 독립청원을 통한 외교독립노선은 제국주의 속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었다. 이 때문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 단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일찍부터 배격했다. 또한 일제가 임시정부의 국내 연결망을 차단하면서부터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본토와의 연락이 단절된 데다가,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 발언 등에 따른 파문으로 내분도 거세졌다. 당시 심화된 갈등으로 식물정부로 전락한 임시정부의 상황은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될 때까지 이어졌다. 1923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임시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고 1925년 통과시키게 된다.

평가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할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반대로 8·15광복 때도 한국 문제가 한국민족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과는 다르게 처리되고 말았고, 그것이 영국·미국·소련 등 열강의 제국주의적 독단에 의한 결과였으며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였던 점은 27년간(1919∼1945)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반성할 사항으로 볼 수 있다.

참여인물

국무총리 이승만 주석 김구가 내무총장 안창호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사료편찬위원회 주임 이광수 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직원으로 활동했었다.

관련 영상

RDF 및 온톨로지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시정부 이광수 A에서 B가 활동했다.
임시정부 상하이 A가 B에 위치했다.
임시정부 광복군 A가 B를 창설했다.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A가 B를 발했다.
임시정부 연통제 A에서 B를 조직했다.

임시정부 온톨로지.png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대한민국임시정부&ridx=0&tot=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