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첩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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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가나 사회에서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 같은 말로 일부다처제가 있다.

역사

대한민국에서는 일부다처제의 전통이 강했다. 신라시대 지방관리였던 차득공은 처와 첩을 합쳐 세 명이나 두었다. 고려시대 태조 왕건은 후비가 29명이었는데, 왕후 또는 왕태후가 6명이었다. 이처럼 왕비가 여러 명이 되는 것은 성리학에 철저했던 조선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사신이 기록한 고려 풍속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부잣집에서는 3-4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한다.

『고려도경』잡속(雜俗)

조선시대에 남방의 바닷가에서도 여러 부인을 두는 풍습이 있엇다. 아마 뱃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죽는 일이 많아 남자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다처제가 공식적인 혼인 규범은 아니었다. 다처제가 유행하였던 고려시대에서도 일처제가 원칙이었다. 『고려사』박유 전기를 보면 고려 후기에 일부일처제가 확고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부다처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았으면서도 다처제를 묵인해왔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인구를 늘리기 위해 다처제를 권장하려 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 왕이 나라의 호구가 날마다 감소되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서처를 두게 하려 했다. 서처란 본처 외에 또 장가든 양가집 배우자이다. 그 자손에게는 벼슬할 수 있도록 하되, 만약 부부간의 신의를 전혀 지키지 않고 본처를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자는 곧 죄로 다스리게 했다. 이리하여 해당 관청에서 시행하기로 논의하고 있었는데, 김혼이 예법을 위반했으므로 중지하였다.

『고려사』 김경손 전기

김경손의 아들 김혼이 친구 부인과 간통했던 사건이 일어나 실행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시대에 다처제가 실행되고 있었고 본처와 서처는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삼별초의 난 때에 새장가를 들고 적진에서 돌아온 본처를 버린 일이 있었다.

원수 김방경을 따라 진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당시 조정 관리의 처들이 적에게 다수 붙잡혔기 때문에 모두 새장가를 들었는데, 적이 평정된 뒤에 되돌아온 처들이 있었지만 모두 버리고 말았다.

『고려사』 나유 전기

임진왜란병자호란에서도 붙잡혀 간 부인이 돌아왔을 때 이혼을 하고 새 부인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부인이 절개를 지켜 자살하지 않았으니 버려야 한다는 논의가 병자호란이 끝난 당시에는 주종을 이루었다.

잡혀갔던 여인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란을 만나 죽지 못했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고려 말기에는 사대부들이 양처(兩妻)를 두는 것이 유행했다.

고려 말엽에 대소 관료들이 서울과 지방에 양처를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본처와 합한 자도 있고, 먼저 첩을 두고 뒤에 처를 얻은 자도 있고, 먼저 처를 얻고 뒤에 첩을 둔 자도 있으며, 또 동시에 3처를 둔 자도 있어서, 당사자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라고 다투어 분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처를 두고 다시 처를 얻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태종실록 17년(1417) 2월 23일

고향집의 부인을 향처(鄕妻), 서울집의 부인을 경처(京妻)라 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시골에서 구식 여성과 결혼한 뒤에 서울이나 외국으로 유학가서 신식 여성과 다시 결혼하던 일을 연상시킨다. 이런 양처제도는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규범이 자리잡으면서 처는 오직 한 명만 허용하였다. 태종 13년에 중혼(重婚)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다처제가 재산 상속 등의 분쟁을 자주 야기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습은 그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 두 아내를 얻어서 문제가 된 사례들이 종종 보인다.

사헌부에서 “전 헌납 고태필은 아내가 있는데도 다시 아내를 얻고 전처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개인간에 저지른 죄(私罪)로 장 90대를 때리고 후처를 이혼시키고 전처와 다시 합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문종실록 2년(1452) 3월 29일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처로 낙착되었다. 그렇지만 첩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일부다처제의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다. 처를 한 명만 두는 것은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비는 한 명뿐이었고, 왕비가 사망하거나 쫓겨났을 경우에만 계비를 두었다. 그렇지만 첩은 여러 명 둘 수 있었다. 이들은 빈(嬪, 정1품)부터 숙원(淑媛, 정4품)까지의 벼슬을 받았다. 왕의 총애 정도에 따라 품계가 올라가기도 했다.

전통시대에는 배우자가 다수였으므로 이들에게 등급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부인 가운데 본처를 왕후, 그 다음의 처들을 부인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비, 빈 등으로 불렀다. 원래 배우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리 불렸고, 배우자의 숫자도 정해져 있었다. 중국의 고전인 『예기』에 따르면, 배우자 명칭이 천자는 후(后), 제후는 부인(夫人), 상급관료인 대부는 유인(孺人), 하급관료인 사(士)는 부인(婦人), 서민은 처(妻)였다. 천자는 배우자로서 후, 부인, 세부(世婦), 빈(嬪), 처, 첩을 둘 수 있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1후, 3부인, 9빈, 27세부, 81어처(御妻)를 두었고 첩은 숫자가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아래 공후(公侯)는 부인, 세부, 처, 첩을 둘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에 왕은 비와 빈 등을 두었고, 사대부는 처와 첩을 두었다.

처는 혼례의 절차를 모두 갖추어 맞이했고, 첩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도 초기에는 축첩제도가 있어 본처와 첩을 구분했는데, 본처는 양가 부모의 합의에 따라 신부 아버지 측의 주재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경우였던 반면에, 첩은 전쟁의 전리품으로 단지 재산목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전쟁이 없었기에 첩의 성격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처와 첩의 구별이 모호해서 조정에서까지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처와 첩은 신분상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같은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고구려의 씨름 그림으로 유명한 각저총에는 처와 첩인지 아니면 둘 다 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공의 부인들이 두 손을 조아리고 공손히 앉아 있는데 바닥깔개와 식탁이 각각 별도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발해 때에는 부인이 사나워 남편이 쩔쩔맸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大)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10자매를 이루었는데, 번갈아 남편을 기찰하여 측실을 두거나 다른 사람과 교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 한다. 한 남편이 일을 벌였으나 그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아홉 사람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니, 서로 다투어 이렇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따라서 거란, 여진 등과 같은 나라에는 모두 여창(女娼)이 있고, 양민들은 모두 작은 부인이나 계집 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 오직 발해에는 없다.

『송막기문』 발해국

이런 풍조 때문에 발해 남편들은 첩을 두지도 못하였고 흥등가를 찾을 수도 없었다.

조선시대는 양인과 천인, 처와 첩의 구별이 엄격했다. 양인 신분의 첩은 양첩이요 천인 신분의 첩은 천첩이었다. 처에서 낳은 아들을 적자라 하고, 첩에서 낳은 자식을 서얼이라 하는데, 양첩의 자식은 서(庶), 천첩의 자식은 얼(孼)이라 하였다.

때로는 죄를 지어서 형벌로 첩이 된 사례도 있다.

이보다 앞서 홍윤성이 부모상을 당했는데, 상제의 몸이지만 벼슬에 나가게 하여 절도사로 삼았다. 그때에 어느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집 사람이 자신의 처녀 애를 협박했다고 하여 고소하므로 임금이 홍윤성을 탄핵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집 사람이 무고한 것이 밝혀져 그 죄로 마침내 홍윤성의 첩이 되었다.

세조실록 12년(1466) 12월 24일

첩은 희첩, 측실, 소실, 부실(副室), 별실, 작은집, 작은마누라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는 ‘각시(加氏, 各氏, 閣氏)’라는 말도 썼던 모양이다.

이런 축첩 풍습이 먼 옛날의 얘기만은 아니다. 근래에 편찬된 1910년대 재판기록을 보면 처첩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2년간 함께 살던 첩이 집을 나가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조선인 사이에서 부첩 관계는 부부와 같은 엄숙하고 정중한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당사자 일방의 의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해소될 수 있다”며 판결은 여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축첩 현상은 불과 40, 50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고 사회적 비리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또 이를 반대하는 여인들의 시위도 있었다. 4 ·19 직후인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 여성단체 회원들이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축첩자는 투표 말자, 새 공화국 더럽힌다”, “우리 여성은 축첩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다”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첩을 데리고 있는 국회의원 후보는 찍지 말자는 시가행진이었다.

RDF

A B 관계
축첩제도 고려시대 A를 B가 허용하다.
축첩제도 조선시대 A를 B가 허용하다.
축첩제도 나혜석 A를 B가 비판하다.
축첩제도 현대여성 A를 B가 거부하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