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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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재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4일 (수) 16:04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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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22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 홍사용, 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 도일하여 동경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 입학

1923. 03 '아테네 프랑세' 수료, 「나의 침실로」(«백조» 3호) 발표,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학살에 분노, 이듬해 3월 귀국.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고향 친구 박태원의 죽음을 두고 쓴 시 「이중의 사망」(«백조» 3호) 발표.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 결성

1930년대

년도 내용
1930년 「대구행진곡」(«별건곤(別乾坤)» 10월호) 발표
1932년 담교장이라 칭하던 서문로 집을 처분하고 대구시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전
1933년 8월 경북지사로부터 교남학교 강사 인가(경북학비 제 449호)를 받고 근무. 담당은 조선어와 영어, 이듬해 사임. 「반딧불」, 「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신가정» 10월호) 발표
1934년 차남 충희(忠熙) 출생.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 대구시 중구 남성로 35번지로 이주
1935년 시 「역천」(«시원» 2호), 「나는 해를 먹다」(«조강» 2호) 발표, 백부 소남 이일우 사망
1936년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행.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3개월 유람한 후 귀국
1937년 귀국 후 경찰에 구금되어 20여 일 심한 고초를 겪음.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 작사. 대구시 중구 종로2가 72번지로 이주
1938년 태희(太熙) 출생
1939년 6월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로 이사.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와 보관 중이던 고월 유고까지 압수당함

작품

눈이 오시네

반딧불

조선병(朝鮮病)

비 갠 아침

이별(離別)을 하느니……

단조

나의 침실로

독백

그날이 그립다

어머니의 웃음

대구 행진곡

마음의 꽃

파란비

엿장수

가을의 풍경

시인에게

몽환병

역천

서러운 해조

말세의 희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초혼

문학사적 의의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줌

• 이상화가 살다 간 1920년대는 이 땅의 봉건적 유교적 가치 질서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가 와해되고 근대적인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문화적, 정신사적 전환기임.

따라서 민중은 물론 지식인들에게 삶의 딜레마를 한층 가중시킨 궁핍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3·1운동의 실패로 이 땅의 지식인들은 절망과 비애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 상태에 놓임.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며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많음. 하지만, 이상화가 다른 시인들과 달리 민족저항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임.

• 1920년대 시단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자생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철학의 토대 위에 그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였음

이상화 관련 문화공간

상화기념관•이장가문학관

이상화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