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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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1월 30일 (수) 23:42 판 (즉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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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4대 임금(국왕)으로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이름은 도(祹)로 본명은 이도(李裪)이다.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는 세종(世宗),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세종은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비(妃)는 심온(沈溫)의 딸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태종 8년(1408)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태종 12년(1412)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제(褆)가 폐세자(廢世子)가 됨으로써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8월 22세(만21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이 건국 되고 5년이 지난 1397년(태조 6년)에 태어났다. 그렇기에 고려인이었던 태조, 정종, 태종과 달리 첫 조선인 국왕이었다.
세종은 3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공적을 남겨 조선은 물론 한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단 둘 뿐인 군주이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훈민정음)은 현대 한반도(대한민국과 북한)의 공용 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다. 또한,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종의 업적은 현대 한국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세종은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생애

어린 시절(즉위 이전)

세종대왕은《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7년(태조 6년) 음력 4월 10일에 당시 정안군이었던 이방원정녕옹주였던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로 다섯 명의 형이 있었는데 맨 앞의 3명의 형은 세종이 어린 시절 일찍이 사망하여 양녕대군효령대군에 이어 3남으로 자랐다.

1408년(태종 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세종은 어릴 적부터 한번 잡은 책은 끊임없이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덕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병을 앓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책을 읽으려고 하여 건강을 해칠까 염려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지만 병풍 뒤, 몰래 숨겨둔 《구소수간(歐蘇手簡)》을 붙잡고 책이 해질 때까지 계속 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태종은 아들인 충녕(세종)의 취미 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하여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산수, 천문학,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발로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 한 것이다. 충녕대군(세종)은 셋째 왕자였기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인해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는 의견도 존재했지만 사실은 지나친 패악질로 인해 아버지 태종이 그를 비호하고자 해도 비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세종의 재위 초기에 약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의 권력이 강해지며 양녕대군의 처우도 좋아졌다.

즉위 이후

태종은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달만인 1418년(태종 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준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세종 4년)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사망한 뒤에야 진정으로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 태종이 사망한 후에도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 뿐이었다. 1422년(세종 4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정현과 좌의정이었던 이원, 우의정이었던 정탁, 병조판서였던 조말생, 이조판서였던 허조, 호조판서였던 이지강 등 주변에는 온통 아버지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고자 세종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폐세자인 양녕대군에 관한 일이 있었다. 태종의 상을 치르고자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렸다. 이때 내용 중,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부왕이신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의 왕도 절대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러한 상소가 계속되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거나 무시했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12월 27일 (병자)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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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 지식콘텐츠(2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작성자 천성현

훈민정음과 난중일기(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