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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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3일 (목) 17:45 판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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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1902.05.15~1950.09 추정)

생애

한약상의 장남으로 출생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지룡(池龍)이라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짓게 되었다.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프란시스코(方濟角)라는 세례명도 갖고 있었다.

위기의 문학적 요람기

1910년(9세)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12세)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하였다. 당시 부친이 약상을 경영했기 때문에 집안에 부가 축적되어 있었으나 느닷없는 홍수로 인해 가세가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유학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향학열을 억누르지 못한 정지용은 서울로 상경하여 처가의 친척집에서 약 3년 동안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시객들에게 한문을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1918년(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문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 동급생인 이선근박제찬,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이들은 뒷날까지도 정지용과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이 되는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일 정도로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으나, 담임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휘분고보를 졸업하고 한 달 후, 정지용은 1923년 4월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물과 세계를 접하는 한편, 자신의 빈곤한 처지와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도움을 받는 교비장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 유학생이라는 내·외적 압박에 시달렸으리라 추정된다.

그의 첫 작품 「카페프린스」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청년들의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26년 유학생회지 <학조>의 창간호에 정지용은 「카페프린스」 외에도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을 비롯해 시조와 동요를 발표하고 다양한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이후에도 근대 풍물과 이국정서를 신선한 감각으로 화폭에 담은 듯 한 시들을 발표한다. 곧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정지용은 이듬해 <신민>과 <문예시대>그리고 <조선지광>에 여러 작품을 쏟아낸다. 당시 일본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큐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 <근대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지면을 장식함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윌리암 블레이크에 관한 논문을 내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정작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의 타고르와 자신을 뽑아 준 기타하라 하큐슈의 시, 중국의 한시와 같이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시였다.

암흑기

정지용은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그의 모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기초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는지 종종 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려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그 와중에도 정지용은 계속 시인활동을 이어가 1941년 9월 시집 「백록담」을 간행하였고,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항복할 때까지 당시 문인들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살아가야만 했는데 정지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8·1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게 되며,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도 하게 된다. 194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세계를 고집하던 시인 정지용이 느닷없이 민족문학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행위로 미온적으로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과 이태준, 이병기 등 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 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지용은 정확한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과 경향신문 주간직을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이듬해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면서 강연에 동원되기도 했다.

학력 사항

  • 옥천공립보통학교
  • 휘문보통고등학교
  • 도시샤대학교 영문학

경력 사항

  •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
  • 시문학 동인
  • 구인회 활동
  • 문장지 추천위원
  • 경향신문 편집국 국장
  •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
  •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분과 위원장
  • 서울대학교 <시경> 강의
  • 국민보도연맹 강제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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