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지용(1902.05.15~1950.09 추정)

생애

한약상의 장남으로 출생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지룡(池龍)이라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짓게 되었다.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프란시스코(方濟角)라는 세례명도 갖고 있었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위기의 문학적 요람기

1910년(9세)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12세)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하였다. 당시 부친이 약상을 경영했기 때문에 집안에 어느정도 부가 축적되어 있었으나 느닷없는 홍수로 인해 가세가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유학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향학열을 억누르지 못한 정지용은 서울로 상경하여 처가의 친척집에서 약 3년 동안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시객들에게 한문을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1918년(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문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 동급생인 이선근박제찬,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이들은 뒷날까지도 정지용과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동인지 <요람>을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이 되는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일 정도로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으나, 담임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휘분고보를 졸업하고 한 달 후, 정지용은 1923년 4월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물과 세계를 접하는 한편, 자신의 빈곤한 처지와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도움을 받는 교비장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 유학생이라는 내·외적 압박에 시달렸으리라 추정된다.

그의 첫 작품 「카페·프란스」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청년들의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26년 유학생회지 <학조>의 창간호에 정지용은 「카페·프란스」 외에도 「산엣 색시 들녘 사내」, 「슬픈인상화」 등의 시 작품 발표.

이후에도 근대 풍물과 이국정서를 신선한 감각으로 화폭에 담은 듯 한 시들을 발표한다. 곧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정지용은 이듬해 <신민>과 <문예시대>그리고 <조선지광>에 여러 작품을 쏟아낸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은 「향수」다. 당시 일본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큐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 <근대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지면을 장식함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윌리암 블레이크에 관한 논문을 내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정작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의 타고르와 자신을 뽑아 준 기타하라 하큐슈의 시, 중국의 한시와 같이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시였다.

암흑기

정지용은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그의 모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기초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는지 종종 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려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그 와중에도 정지용은 계속 시인활동을 이어가고자 1933년 이상, 박태원, 이태준, 김기림, 조용만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문장>지의 창간과 함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들은 조지훈, 김종한, 이한지, 김수돈,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등의 청록파 시인들이다. 이들은 해방 후 시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크다. 정지용은 1941년 9월에는 시집 「백록담」을 간행하였고, 12월에는 태평양 전쟁 이후 항복할 때까지 당시 문인들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살아가야만 했는데 이는 정지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8·1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게 되며,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도 하게 된다. 194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세계를 고집하던 시인 정지용이 느닷없이 민족문학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행위로 미온적으로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과 이태준, 이병기 등 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 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지용은 정확한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과 경향신문 주간직을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평론집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이듬해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면서 강연에 동원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납북 그리고 사망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정지용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면서 그의 행적이 묘연해졌다. 사망 시기도 확실치 않아 1953년 북한 평양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3년 4월 북한의 <통일신보>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지용의 사망 시기를 발표하게 된다. 발표 내용에는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납북되는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납북과 사망 이후 비극

1950년 납북되고 사망하기까지 한 이후, 정지용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가 난무했다. 일제강점기는 그에게 친일시인이라는 누명을 씌웠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은 그를 월북시인으로 낙인찍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 등이 무려 30년 넘게 금기되며 한국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다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정부의 해금 조치로 정지용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사망 이후 1988년까지는 정지용이라는 한 인간의 비극이자 문학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 정지용의 삶은 20세기 전반기의 식민지를 살아야 했고, 민족 분단을 경험해야 했으며, 결국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의 작품과 그 업적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력 사항

  • 옥천공립보통학교
  • 휘문보통고등학교
  • 도시샤대학교 영문학

경력 사항

연보

연도 내용
정지용 생애 연보
1902년 (1세) 6월 20일(음력 5월 15일) 한약상을 운영하던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
1910년 (9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입학.
1913년 (12세) 동갑내기 송재숙과 결혼.
1915년 (14세)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처가의 친척집에서 약 3년 동안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며 한문을 배움.
1918년 (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동인지 <요람> 간행.
1919년 (18세) <서광> 창간호에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3인」을 발표.
1923년 (22세)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
1926년 (25세) 유학생회지 <학조>의 창간호에 데뷔작 「카페·프란스」, 「산엣 색시 들녘 사내」, 「슬픈인상화」 등의 시 작품 발표.
1927년 (26세) <신민>과 <문예시대>그리고 <조선지광>에 여러 작품 발표.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향수」.
1929년 (28세)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가 됨.
1930년 (29세)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동인지 <시문학> 발간. 시 「유리창」, 「갑판 위」, 「호수 1」, 「호수 2」 발표.
1931년 (30세) 시 「유리창 2」, 「석류」, 「아침」 발표.
1933년 (32세)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간한 월간지 <가톨릭 청년> 편집 고문 역임. 시 「해협의 오후 2시」, 「임종」, 「비로봉」, 「시계를 죽임」 등 발표. 구인회 가담 및 활동.
1935년 (34세) 첫 시집 「정지용 시집」 출간.
1939년 (38세) <문장>지 창간과 함께 시 부문 심사위원 역임.
1941년 (40세) 시집 「백록담」 간행.
1945년 (44세)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이 되어 활동함.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함.
1946년 (45세)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됨. 「지용시선」 발간.
1947년 (46세) 서울대학교에서 <시경> 강의
1948년 (47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과 경향신문 주간직 사임. 평론집 「문학독문」 발간.
1949년 (48세)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며 강연에 동원됨.
1950년 (49세)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 납북되는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사망.

작품세계

정지용의 시 세계는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첫째, 시어 구사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둘째, 시의 형식면에서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성법에 기초한 2행의 단시형과 동시로서는 독특한 줄글식 산문시형을 보여주었다. 셋째, 시인의 감정이 시에 노출되는 것을 엄격히 배제한 대상묘사의 모더니즘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자면, 정지용은 시어를 고르고 다듬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고어나 방언을 시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로 개발했다. 시의 형식면에서 그는 2행 1연으로 된 단시형을 즐겨 썼다. 또한 줄글식 산문시형도 즐겨 썼는데, 이들 작품은 쉼표나 마침표 없이 문장이 종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연계적 구성을 보여준다. 20년대 김소월이 자아표출을 통하여 자기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한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정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깔끔한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열어 보였다.

정지용은 서구의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였다. 「슬픈인상화(印象畵)」, 「파충류동물(爬蟲類動物」 등의 초기 시편은 형태주의적 기법을 보이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정지용이미지즘은 단순한 시적 기술과 기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지용이미지즘은 표현한 것 외의 먼 운치를 감지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후기 시편에서 많이 나타난다. 문학 평론가 '김우창'은 정지용에 대해 “감각과 언어를 거의 가톨릭적 금욕주의의 엄격함으로 단련하여 「백록담」에 이르면, 감각의 단련을 무욕(無慾)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경지에 이른다.”고 평론하기도 하였다. 시인 '최동호' 또한 정지용을 “서구 추수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작품 및 저서

1. 갈릴레아 바다

2. 갑판 우

3. 겨울

4. 고향

5. 구성동九城洞

6. 귀로歸路

7. 그의 반

8. 기차

9. 꽃과 벗


10. 나무

11. 나비

12. 난초

13. 내맘에 맞는 이


14. 다른 한울

15. 다시해협

16.

17. 따알리아

18. 딸레

19. 또 하나 다른 태양

20.

21.



22. 무서운 시계

23. 무어래요


24. 바다1, 바다2, 바다3, 바다4, 바다5, 바다6, 바다7, ㅂ다8, 바다9

25. 바람1, 바람2

26. 발열發熱

27.

28. 백록담白鹿潭

29. 별똥

30. 별1, 별2

31.

32. 불사조

33. 붉은 손

34.

35. 비듥이

36. 비극

37. 비로봉1, 비로봉2

38. 뻣나무 열매


39. 산너머 저쪽

40. 산소

41. 산에서 온 새

42. 산엣 색시 들녘 사내

43. 삼월 삼짓 날

44. 새빨간 기관차

45. 석류

46. 선취船醉

47. 소곡小曲

48. 숨ㅅ기내기

49. 슬픈인상화印像畵

50. 시계를 죽임


51. 아침

52. 압천

53. 엽서에 쓴 글

54. 예장禮裝

55. 오월소식

56. 옥류동玉流洞

57. 유리창1, 유리창2

58. 유선애상流線哀傷

59. 은혜

60. 이른봄 아침

61. 인동차忍冬茶

62. 임 종


63. 장수산長壽山1, 장수산長壽山2

64. 저녁햇살

65. 절정絶頂

66. 조약돌

67. 조찬朝餐

68. 종달새

69. 지는 해

70. 지도

71. 진달래


72. 촉불과

73. 춘설春雪


74. 카페·프란스


75. 태극선太極扇


76. 파라솔

77. 폭포

78. 풍랑몽1, 풍랑몽2

79. 피리


80. 할아버지

81. 해바라기씨

82. 해협

83. 향수

84. 호랑나비

85. 호면

86. 호수1, 호수2

87. 홍시

88. 홍역紅疫

89. 홍춘紅椿

산문

1. 「無序綠」 읽고나서

2. 創世紀」와 「周南...

3. 『뀌리夫人』의 書評

4. 가람시조집 발

5. 가람시조집에

6. 가장 시원한 이야기

7. 공동제작

8. 觀劇小記

9. 校正室

10. 구 름

11. 歸去來

12. 그리스도 본바듬

13. 기상예보와 美蘇共委

14. 汽車

15. 꾀꼬리

16. 꾀꼬리와 菊花


17. 날은 풀리며 벗은 앓으며

18. 南病舍 七號室의 봄

19. 남북회담에 그치랴?

20.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


21. 茶房

22. 달과 自由

23. 대단치 않은 이야기

24. 더 좋은 데 가서

25. 도야지가 사자 되기까지

26. 동경대진재 여화(餘話)

27. 동백나무

28. 때까치



29. 毛允淑女史에게 보내는 편지

30. 舞姬 張秋華에 관한 것

31. 文人과 愚問賢答(說問答)

32.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

33. 민족해방과 公式主義

34.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싸움


35. 별똥이 떨어진 곳

36. 보 리

37. 釜山 2

38. 紛紛說話

39.

40. 비들기


41. 사시안(斜視眼)의 불행

42. 散 文

43. 三 人

44. 序 대신-시인 수형께 편지로

45. 서왕록(逝往錄) (上), 서왕록(逝往錄) (下)

46. 石榴ㆍ甘 ㆍ柚子

47. 宣 川 1, 宣 川 2, 宣 川 3

48. 說問

49. 說問答

50. 소묘(素描)

51. 小說家 李泰俊君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

52. 愁誰語 (Ⅰ-1 ~ Ⅲ-2), 愁誰語(Ⅲ-3 ~ Ⅳ-2)

53. 詩 選 後

54. 詩가 滅亡을 하다니 그게 누구의 말이요

55. 詩文學에 대하야

56. 詩와 발표

57. 詩의 옹호

58. 詩의 威儀

59. 時調寸感

60. 신앙과 결혼

61. 失籍島

62.


63. 安 岳

64. 알파.오메가

65. 鴨川上流(上), 鴨川上流(下)

66. 女像四題

67. 여적(餘滴)

68. 영랑(永郞)과 그의 시

69. 옛글 새로운 정(上), 옛글 새로운 정(下)

70. 五龍背 1, 五龍背 2, 五龍背 3

71. 오무백무(五畝百畝)

72. 烏竹·孟宗竹

73. 우 산

74. 우통을 벗었구나 (스승에게 받은 말)

75. 월탄의 『금삼의 피』와 각지 비평과 독후감

76. 월파와 시집 『망향』

77. 義 州 1, 義 州 2, 義 州 3

78. 依服一家見(胡淑譚)

79. 離家樂

80. 一片樂土

81. 입정각(入定閣)


82. 鄭勳謨女史에의 再期待

83. 조선시의 반성

84. 趙芝薰에게 보내는 편지

85. 趙澤元 무용에 관한 것

86. 晋州 1, 晋州 2, 晋州 3, 晋州 4, 晋州 5


87. 참신한 동양인

88. 天圭堂

89. 체화

90. 春正月의 美文體



91. 統營 1, 統營 2, 統營 3, 統營 4, 統營 5, 統營 6


92. 平 壤 1, 平 壤 2, 平 壤 3, 平 壤 4

93. 平和日報記者와 一問一答

94. 플라나간 神父를 맞이하여


95. 한 개의 反駁

96. 합숙(合宿)

97. 海峽病 1, 海峽病 2

98. 헨리 월레스와 계란과 토마토와

99. 호낭가(胡娘街)

100. 畵文點綴 1, 畵文點綴 2

101. 화문행각(畵文行脚)


  • 기타

102. C娘과 나의 소개장

103. 3인

평론

1. 문학독문

연구 결과물

기타 사항

수상내역

  • 2018년 금관문화훈장

정지용 문학상

정지용 문학상이란 시인 정지용의 문학적 성과와 문학사적 위치를 기리기 위해 1989년 시와 시학사에서 제정한 문학상이다. 한햇동안 발표된 중진 및 중견 시인들의 작품 중 작품성이 뛰어나고 낭송하기에도 적합한 시를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수상년도 수상작 저자
1989년 (1회) 서한체(書翰體) 박두진
1990년 (2회) 해변(海邊)가의 무덤 김광균
1991년 (3회) 작은 戀歌 박정만
1992년 (4회) 龜龍寺詩篇. 겨울노래 오세영
1993년 (5회) 石榴 이가림
1994년 (6회) 큰 노래 이성선
1995년 (7회) 昇天 이수익
1996년 (8회) 마음의 고향.6 -初雪 이시영
1997년 (9회) 白頭山 天池 오탁번
1998년 (10회)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1999년 (11회) 눈내리는 대숲 가에서 송수권
2000년 (12회) 하늘의 그물 정호승
2001년 (13회) 등신불 김종철
2002년 (14회) 백학봉(白鶴峰) 1 김지하
2003년 (15회) 낙산사 가는길 3 유경환
2004년 (16회) 돌아가는 길 문정희
2005년 (17회) 세한도 유자효
2006년 (18회)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2007년 (19회) 아득한 성자 조오현
2008년 (20회) 마음화상 김초혜
2009년 (21회) 바이올린 켜는 여자 도종환
2010년 (22회) 발견의 기쁨 이동순
2011년 (23회) 왕인의 수염 문효치
2012년 (24회) 옥상의 가을 이상국
2013년 (25회) 그리운 나무 정희성
2014년 (26회) 풀꽃 2 나태주
2015년 (27회) 사랑 세 쪽 이근배
2016년 (28회) 국물 신달자
2017년 (29회) 시계 김남조
2018년 (30회) 그 손 김광규

관련 인물

관련 콘텐츠

정지용의 향방

정지용의향방.jpg

연극 정지용의 향방은 2018년 11월 30일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무료로 진행되었던 연극이다. 정지용이 도시샤대학교 재학 당시 발표한 시이자 그가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결정적 계기인 「향수」의 탄생 과정과, 일제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고민과 번뇌 등을 내용으로 다뤘다. 정지용의 삶을 다룬 최초의 연극이라는 의의가 있다.

지용제

지용제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자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정지용을 추모하고, 그의 시문학 정신을 이어가며 더욱 발전시키자는 뜻에서 매년 5월에 그의 고향 옥천에서 열리는 문학축제다. 1988년 해금 이후 정지용을 기리는 추모제에서 그와 함께하는 문학축제로 발돋움하여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9년 현재 32회까지 개최되었다.

동행

동행포스터.jpg

위 사진은 단편영화 동행의 포스터다. 영화 동행은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과 옥천의 대표음식 생선국수를 소재로 한 2012년 영화다. 충북의 문화원형을 바탕으로 한 단편영화용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정지용의 대표작 「호수」와 옥천군의 명소인 부소담악의 절경을 담았으며, 사진작가인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과거의 정지용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호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정지용 3인 A는 B를 집필하였다
정지용 요람 A는 B를 창간하였다
정지용 카페·프란스 A는 B를 집필하였다
정지용 향수 A는 B를 집필하였다
정지용 이상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정지용 박태원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정지용 이태준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정지용 김기림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정지용 조용만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정지용 구인회 A는 B의 소속이다
정지용 청록파 A는 B에 영향을 미쳤다
정지용 박두진 A는 B에 영향을 미쳤다
정지용 박목월 A는 B에 영향을 미쳤다
정지용 백록담 A는 B를 간행하였다
정지용 경향신문 A는 B의 소속이었다
정지용 조선문학가동맹 A는 B의 소속이었다
정지용 이화여자대학교 A는 B의 소속이었다
정지용 국민보도연맹 A는 B의 소속이었다
정지용 납북 시인 A는 B를 대표한다
정지용 이미지즘 A는 B를 대표한다
정지용 모더니즘 A는 B를 대표한다
정지용 유리창 A는 B를 집필하였다
정지용 호수 A는 B를 집필하였다
정지용 교수 A는 B이다
정지용 문학독문 A는 B를 출간하였다
정지용 형태주의적 기법 A는 B를 사용하였다
정지용 순수시 A는 B를 대표한다
정지용 현대시 A는 B를 대표한다
정지용 금관문화훈장 A는 B를 수상하였다
정지용 문장지 A는 B의 소속이었다
정지용 시문학 A는 B를 창간하였다

네트워크 그래프

정지용그래프1.JPG

참고자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