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파울 루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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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지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9일 (수) 19: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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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의 심판 화가.

생애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생전에 화가 겸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영국의 찰스 1세,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 마리 드 메디시스를 포함한 그의 후원자들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고향인 안트베르펜에서 대규모의 공방을 운영했다. 그의 수많은 조수와 제자들로 매우 번창했던 이 공방은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다른 화가들이 그것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수백 점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루벤스는 많은 그림에 끝손질만 했으며, 대개는 공방의 화가들이 그렸다. 이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중심지에 화려한 저택과 정원을 지을 수 있었다. 루벤스는 어린 시절에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스물두 살의 나이에 독립 화가가 되었다. 2년 후인 1600년에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10년 동안 루벤스는 현재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두 점의 중앙 제단화인 <십자가 세우기>(1610)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11~1614)를 포함하여 다수의 중요한 주문들을 맡았다. 1630년대에 찰스 1세는 루벤스에게 이니고 존스가 설계한 런던 화이트홀 연회장에 천장화를 그릴 것을 주문했다. 찰스 1세는 또한 그를 마드리드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왕실 소장품으로 있는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모사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풍경화에 열중했다. 이 시기에 그린 매우 개인적인 작품들에서 색은 엷어지고 역동성은 느슨함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존 컨스터블과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루벤스의 그림은 유려한 화풍의 에너지로 충만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예술양식

대표작품

아킬레우스의 죽음.jpg

삼미신.png

  • 작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 제작: 1639
  • 소장: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크기: 221 x 181 cm

파리스의 심판.png

  • 작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 제작: 1639
  • 소장: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크기: 199 x 379 cm
  • 신화: 세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한자리에 모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시합이 열렸다. 우승자에게는 황금사과가 주어지는 이 시합의 심사위원으로는 산에서 양을 치던 목동 파리스가 낙점되었다.

파리스의 심판이라 불리는 이 세기의 미의 대결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중세 이후 신화 주제에 눈을 돌린 미술가들 역시 이 매력적인 사건에 주목하였다. 그렇게 '파리스의 심판'은 서양 미술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신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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