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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 만해(萬海·卍海)이며,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익혔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집에서 안주하고 있을 수 없어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물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우다가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 만해(萬海·卍海)이며,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익혔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집에서 안주하고 있을 수 없어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물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우다가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항였으며 청년운동을 종교인 불교로 강화하였으며 월간지를 연재하며 장편소설을 연재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사망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우리나라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항였으며 청년운동을 종교인 불교로 강화하였으며 월간지를 연재하며 장편소설을 연재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사망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우리나라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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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3일 (수) 20:47 판


소개

한용운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고 수 많은 시를 남긴 시인이다. 또한 동시에 소설을 연재한 문학인이기도 하다.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 만해(萬海·卍海)이며,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익혔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집에서 안주하고 있을 수 없어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물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우다가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항였으며 청년운동을 종교인 불교로 강화하였으며 월간지를 연재하며 장편소설을 연재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사망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우리나라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경력사항

경력사항
1930.05 만당 당수
1927 경성지회 회장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24 불교청년회 회장
1923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
1913 불교학원 교원
1905 백담사 승려

수상내역

수상내역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보

한용운 연보(1879.08.29~1944.06.29)
1879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의 아들로 출생.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92 전정숙과 결혼.
1894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이후 인제군 백담사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

1908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에 참여.
1913 통도사 불교강사 취임.

《조선불교 유신론》 간행.

1914 《불교대전》 저술.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1917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8 월간지 《유심》 창간.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함.

독립선언서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3년간 복역.

1926 시집 《님의 침묵》 출판. <가갸날에 대하여> 《동아일보》에 발표.
1927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지냄..
1931 《불교》지를 인수함.
1932 수필 <평생 못 잊을 상처>를 《조선일보》에 발표.
1935 장편 《흑풍》 연재.
1944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자택 심우장에서 사망.
1973 7월 《한용운전집》 간행.
1997 백담사에 만해기념관 건립.


작품세계

그의 작품세계에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담담하면서도 여성적인 어조를 통해 정서적 공감을 끌어내는 것에 있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표현함과 동시에 조국의 광복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떠한 어려움에 있어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꾸준히 기다리겠다는 '저항정신'과 '극복정신'을 보여준다.

대표작품

  • 님의 침묵
  • 나룻배와 행인
  • 당신을 보았습니다
  • 복종
  • 알 수 없어요
  • 이별은 미의 창조
  • 찬송


출처

두산백과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