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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1906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1906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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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속 비석은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이다.
 
위 사진 속 비석은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이다.

2019년 6월 16일 (일) 00:31 판



생애

1987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여러 학문을 탐독하며 1888년 1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역임하는 등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활동

군수

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1906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파일:홍범식군수애민선정비(피향정).png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위 사진 속 비석은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이다.

독립운동

그가 금산군수에 있으며 군민들을 위한 행정을 펼치던 와중에도 국내 정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1910년, 조선의 경찰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경찰권을 강탈 당하고 이후 외교와 군사, 사법권까지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이 한일병합에 관한 협의를 주고받은 뒤 친일내각이 회의를 거쳐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홍범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유서가 담긴 상자를 건네고 집으로 돌려보낸 뒤 관아의 객사로 향했다. 시종하는 고을 사령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목을 매어 자결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러나 그는 사령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김지섭에게 건넨 상자에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있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아들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1910. 8. 29)

이는 며느리에게 남긴 유서로, 분실에 대비하여 베껴놓은 것이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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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