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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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와 달동네

성북구의 돈암동 일대와 이웃한 지역에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도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불량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시는 4대문 안에서 화재나 수재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교외로 밀어냈고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정부가 준 변두리의 국공유지로 이주했다. 서울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미아리로 계속 유입되어 해마다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재민의 정착촌으로 불리는 달동네는 그렇게 생겨났다. 도시빈민의 마지막 보금자리는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달동네는 다세대 벽돌집으로 변화했고, 도시의 성장과 인구의 증가를 감당하기 위한 주택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였다. 30년 동안 지속된 아파트 건설은 특색 없는 도시경관을 만들어 냈다. 현재 성북구에는 장수마을과 북정마을이 남아 근대 서민문화유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정마을

북정마을은 한양도성 백악구간 조선시대 축조된 한양도성 백악구간과 가장 가깝게 형성된 마을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2호,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城北洞曝白燻造契完文節目)에는 도성의 북쪽 성북동에 둔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한 후 이들을 면포를 삶거나 빠는 ‘포백’과 콩으로 메주를 만드는 ‘훈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따라서 메주 만들어 쑤는 소리가 ‘북적 북적’하고 사람도 ‘북적 북적’하다는 의미가 북정마을의 이름의 유해가 되었다. 북정마을은 19세기 중엽 천주교도박해 때 서울성안의 교인들이 피신하여 숨어 살던 때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성 밖의 맑은 공기와아름다운 경관을 찾아 모여든 한량과 기생들, 이태준,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 그리고 병약한 환자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며 북정마을은 도시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이후 성북동은 1960~70년대부터 주요 재계인사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고급주택 및 외교사택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남쪽의 부촌과 달리 북쪽의 북정마을은 판자집이 난립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서울한양도성 북악산 성곽은 1968년 폐쇄되어 통제되었다가 2007년 완전히 개방되었다. 지금은 1970~80년대의 풍경을 간직한 마을로 알려져 주변 문화공간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와 성북구는 한옥과 관광을 겸한 지대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한양도성에는 8개의 암문이 있다. 대부분 성곽마을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의해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인왕산 무악동, 창의문과 백악마루 사이, 백악산 곡장아래, 성북동 북정마을, 낙산공원 정상, 낙산 이화동, 낙산 창신동, 장충동 구간 다산동에 8개의 암문이 위치하고 있다.

역사를 품다

19세기 중엽 천주교도박해 때 서울성안의 교인들이 피신하여 숨어 살던 때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성 밖의 맑은 공기와아름다운 경관을 찾아 모여든 한량과 기생들, 이태준,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 그리고 병약한 환자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6·25전쟁을 거치며 북정마을은 도시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이후 성북동은 1960~70년대부터 주요 재계인사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고급주택 및 외교사택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남쪽의 부촌과 달리 북쪽의 북정마을은 판자집이 난립한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여진다. 1960-70년대에 건축된 500채 정도의 기와집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1960-70년대 서울의 정취를 북정마을에서 느낄 수 있다. 1969년 김광석 시인이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북정마을에는 해마다 지역 특성을 살린 ‘Wall月축제’를 열어 공동체 의식을 함께 나누는 축제를 진행한다. 마을 주변에는 만해 한용운이 말년에 거처한 심우장, 상허 이태준 가옥, 성북동 최순우 가옥도 그대로 남아있다.

인물

김광섭

김광섭은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성북동 168-34번지에 살았다. 1990년대에 빌라가 들어서면서 김광섭의 집은 철거되었고, 현재 그 집의 입구에 집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북정마을은 김광섭이 ‘성북동 비둘기’를 쓴 배경이기도하다. 김광섭의 시를 기념해 비둘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한옥

심우장

심우장(尋牛莊)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1984년 7월 5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7호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50호로 승격되었다. 한용운은 호는 만해(萬海)를 사용하여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자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님의 침묵>이 있다.


이태준 가옥

이태준은 한국의 소설가이다. 아호는 상허(尙虛), 별명은 한국의 모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1925년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산문단》, 《시대일보》에 발표, 등단했다. 이후 〈농군〉,〈돌다리〉,〈해방전후〉 등 여러편의 단편과 《제2의 운명》,《왕자 호동》 《청춘 무성》 등 장편소설 작품을 집필하셨다. 이태준가옥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으로 운영중이다.

최순우 옛집

[최순우] 선생님은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직에 계셨으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문화재위원회 위원에 계셨다. 최순우 옛집은 2002년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통해 시민들의 후원금을 모은 최초의 시민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 복원하여 최순우 옛집으로 개방하고 있다.

축제

월월 축제

월월축제는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교수,연극학 박사이자 평론가, 극예술교육가인 이혜경교수님이 총감독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성북구 북정마을에서 기획하고 실행된 마을 축제이다. 월월 이라는 제목은 계층과 계층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 예술과 일상생활의 사이를 뛰어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축제는 세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관청 대학 예술가 주민들 사이의 창조적 파트너쉽 구축이다. 둘째 예술교육을 통한 주민들의 창의적인 활동 셋째 이웃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세대간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2009년-달빛스케치,일상의 공간 축제의 공간

2010년-별빛멜로디, 배우고 놀며 주인공되기

2011년-노을빛, 하모니 역사적 공간 이야기의 유산의 큰 주제로 진행되었다.

관련자료

지역문화N

이혜경. (2016). 극장 밖으로 나간 커뮤니티 연극의 실천적 사례 - 월월축제: 마을공간과 스토리텔링의 융합을 통한 공감공동체를 향하여. 한국연극학, 1(60), 37-74.

이지아. "서울 한양도성 성곽마을 창출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4.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