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4번째 줄: | 4번째 줄: | ||
!colspan="2" style="background: #FAF4C0;color:#FFRR00; font-size:120%; text-align:center;"|상하이 임시정부 | !colspan="2" style="background: #FAF4C0;color:#FFRR00; font-size:120%; text-align:center;"|상하이 임시정부 | ||
|- | |- |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조선일보.png]]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조선일보.png|300px]] |
|- | |- | ||
|style="font-size:90%; text-align:center;" colspan="2"| | |style="font-size:90%; text-align:center;" colspan="2"| |
2022년 6월 16일 (목) 11:43 판
상하이 임시정부 | |
---|---|
단체명 | 상하이임시정부 |
소새지 | |
국적 | 대한민국 |
활동시기 | 1919년~1948년 |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이원집정부제)->(의원내각제) |
초대설립자 |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
개요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된 신문사로 한국의 신문사들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신문사이고 한국어 신문 중에는 첫번째로 오래된 신문이다. 현재까지도 종이신문을 발간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내에서 2021년 기준 유료 부수가 100만부가 넘는 신문이다. 방송사로는 조선 TV가 있다.
년도 | 발생 사건 |
---|---|
1920년 3월 5일 |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 |
1920년 4월 28일 | 영친왕과 마사코와의 결혼 비판 기사로 인해 압수 |
1920년 8월 15일 | 자본금 불입으로 유문환이 2대 사장으로 취임. |
1920년 8월 27일 | 미국 의원단 방한을 환영하는 기사로 1주간 정간 |
1920년 9월 5일 |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기괴치 아니한가"라는 논설로 무기 정간 |
1921년 4월 8일 |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를 인수해 송병준에게 위임하려 했으나 거절해, 3대 사장은 남궁훈이됨. |
1924년 9월 13일 |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 4대 사장으로 이상재가 취임함. 신간회 결성 주도 및 한글 교재 무상 배포 |
1925년 1월 | 러시아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자, 김준연을 5대 사장 신석우 |
1931년 7월 | 조선일보 6대 사장으로 안재홍이 취임. |
1931년 | 안재홍이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연류됨. |
7대 사장 유진태 | |
8대 사장 조만식 | |
9대 사장 방응모 교육 필화로 인해 총독부에게 기사 압수됨. | |
1940년 |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으로 조선일보 발간 중단. |
1945년 11월 23일 |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속간. |
1947년 ~ |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선 지지. |
1948년 ~ 1950년 6월 24일 | 이승만 정부의 출범 지지 , 반민족 행위자 강력 처벌과 처단 주장, 국가 보안법 제정당시 남용소지 비판 및 국가 보안법 사용 규범 제시 |
1950년 6월 25일 | 북한에게 조선일보가 넘어가면서 인민군 기관지가 됨. |
1950년 10월 1일 |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의 기관지가 되어 한국 전쟁 이슈를 다룸. |
1951년 ~ |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 국근을 지지,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 등과 같은 국군에게 불리한 내용은 다루지 않음. |
1954년 ~ | 자유진영 지지 |
1955년 ~ 1959년 | 이승만 정부의 부산 정치 파동은 다루지 않음. |
관련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