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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경주이나 출신지는 예산이다. | ||
+ | *경주 김문이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그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다. | ||
+ |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1830년 생부 김노경의 옥사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인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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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학의 보조 학문이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등의 학문이 모두 진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금석학과 문자학은 독자적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는 귀국 후에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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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 01:03 기준 최신판
김정희(金正喜)
김정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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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정희(金正喜) |
출생 | 1786년(정조 10) |
사망 | 1856년(철종 7) |
본관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시대 | 조선 |
이칭 | 원춘(元春),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
개요
- 조선 후기(정조~철종 시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한 실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생애
- 본관은 경주이나 출신지는 예산이다.
- 경주 김문이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그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다.
-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1830년 생부 김노경의 옥사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인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었다.
- 1851년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지만 복직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아버지(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
-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 북학파(北學派)의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 경학의 보조 학문이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등의 학문이 모두 진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금석학과 문자학은 독자적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는 귀국 후에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 금석학 연구에 몰두한 결과 그는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진흥이비고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대표적 학자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관호, 조면호 등이 있다.
- 말년에는 수년간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의 대접을 받았다.
-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를 익히고 여러 예서체의 근본을 간파한 후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 그는 난(蘭)을 잘 쳤는데, 그는 난 치는 법을 예서 쓰는 법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그의 서화관은 문자향과 서권기에 녹아 손끝에서 피어난다는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었다.
위치정보(김정희묘)
- 김정희의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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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추천자료
관련자료
인물 | 김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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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김정희 필 난맹첩 김정희 필 차호호공 |
학문 | 북학파 |
예술 | 추사체 |
기거지(유배) | 봉은사 |
작성자
- 이재호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