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소개 및 생애)
(백석과의 관계)
44번째 줄: 44번째 줄: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끝끝내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과 동거하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백석은 1938년 함께 만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자야를 설득한다. 오랜 설득 끝에 함께 숨기로 약속했던 며칠 전, 너무나 사랑하는 백석의 장래와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던 자야는 만주에서 서울로 홀연히 짐을 싸고 만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끝끝내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과 동거하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백석은 1938년 함께 만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자야를 설득한다. 오랜 설득 끝에 함께 숨기로 약속했던 며칠 전, 너무나 사랑하는 백석의 장래와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던 자야는 만주에서 서울로 홀연히 짐을 싸고 만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4년 동안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김영한은 가슴 속에 묻어둔 백석의 이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시 기준으로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으며 1,000억이 아깝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는 "1,000억이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4년 동안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김영한은 가슴 속에 묻어둔 백석의 이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시 기준으로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으며 1,000억이 아깝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는 "1,000억이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 논란
 
* 논란

2018년 6월 14일 (목) 03:21 판



소개 및 생애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본래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사업에 빠진 친척의 반 강제적인 빚보증과 사업실패로 가정이 파산하게 됐다. 집안이 몰락한 후 1931년에 15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 신랑에게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우물 옆에서 빨래하는 사이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는 비운을 맞았다. 1932년 친구의 언니 김수정이 기생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본 김영한은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된 김영한은 한국 정학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전국적인 문예지인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재를 겸비해 노래와 춤만이 아니라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는 미모의 기생이었다.

1936년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인 해관선생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의 교도소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여자고등학교)교사들의 회식자리인 함흥관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의 옆자리에 운명적으로 앉게 된다.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1937년 김영한이 홀로 서울로 떠나자 백석은 교사생활조차 버리고 김영한을 쫓아 서울 청진동 그녀의 집으로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약 3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으며,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백석과의 관계

1936년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사들의 회식자리에서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백석 또한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하여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나의 마누라입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 이별은 없습니다.”하면서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 젊은 시절의 김영한과 백석

김영한 젊은시절.jpg 백석 1937년.jpg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1937년 김영한이 홀로 서울로 떠나자 백석은 교사생활조차 버리고 김영한을 쫓아 서울 청진동 그녀의 집으로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약 3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켜 자야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끝끝내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과 동거하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백석은 1938년 함께 만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자야를 설득한다. 오랜 설득 끝에 함께 숨기로 약속했던 며칠 전, 너무나 사랑하는 백석의 장래와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던 자야는 만주에서 서울로 홀연히 짐을 싸고 만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됐는데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4년 동안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김영한은 가슴 속에 묻어둔 백석의 이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시 기준으로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으며 1,000억이 아깝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는 "1,000억이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 논란

저서

김영한은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몇 편의 수필과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책이 『내 사랑 백석』이다

내사랑백석.jpg

김자야의 에세이 『내 사랑 백석』.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저자 김자야가 백석과의 만남과 이별을 기술한 회고 수필집이다. 백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한 여인의 짧은 사랑과 긴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저자인 김자야(김영한)이 원래 노래와 춤, 시와 글에 재능이 있었기에 청초하고 깔끔한 문체로 백석 시인과의 만남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길상사와의 관계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양준

기여자 : 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