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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추사(秋史) 김정희의 묵란화 16점과 글씨 7점을 수록한 서화첩으로, 김정희의 전담 장황사 [[유명훈]]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2018년 6월 27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 198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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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정조~철종 시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한 실학자이자 서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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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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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이나 출신지는 예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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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문이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그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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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1830년 생부 김노경의 옥사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인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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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지만 복직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아버지(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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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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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 [[북학파|북학파(北學派)]]의 [[박제가|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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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의 보조 학문이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등의 학문이 모두 진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금석학과 문자학은 독자적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는 귀국 후에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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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학 연구에 몰두한 결과 그는 [[북한산순수비|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진흥이비고'''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대표적 학자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관호, 조면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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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는 수년간 [[봉은사|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의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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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예술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를 익히고 여러 예서체의 근본을 간파한 후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사체|추사체(秋史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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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난(蘭)을 잘 쳤는데, 그는 난 치는 법을 예서 쓰는 법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그의 서화관은 문자향과 서권기에 녹아 손끝에서 피어난다는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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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정보(김정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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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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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추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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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428 "김정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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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7835 "금석문(금석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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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3_2560 "북학파" - <우리역사넷>]
*상첩과 하첩 총 2첩으로 이루어져있고, 1830년대~ 1840년대에 제작되었다.
 
*글씨 뿐 아니라 [[사군자]]에도 능했던 김정희는 관련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이 난맹첩'''처럼 묵란만 모은 사례는 유일하다.
 
*난의 형상을 다양한 구도와 모습으로 구현하여 김정희가 추구한 [[사란법|사란법(寫蘭法)]]에 입각해 개성적인 [[필묵법|필묵법(筆墨法)]]을 구사한 대표작이다.
 
*김정희의 서예적 필법을 통해 난을 그리던 화풍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후대 회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기에 회화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현재 [http://kansong.org 간송미술관]이 보유, 관리하고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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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121119830000 "김정희 필 난맹첩"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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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자==
*[[이재호]]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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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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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7일 (수) 01:03 기준 최신판

김정희(金正喜)


개요

  • 조선 후기(정조~철종 시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한 실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생애

  • 본관은 경주이나 출신지는 예산이다.
  • 경주 김문이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그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다.
  •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1830년 생부 김노경의 옥사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인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었다.
  • 1851년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지만 복직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아버지(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

  •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 북학파(北學派)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 경학의 보조 학문이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등의 학문이 모두 진전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금석학과 문자학은 독자적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는 귀국 후에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 금석학 연구에 몰두한 결과 그는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진흥이비고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대표적 학자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관호, 조면호 등이 있다.
  • 말년에는 수년간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의 대접을 받았다.
  •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를 익히고 여러 예서체의 근본을 간파한 후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 그는 난(蘭)을 잘 쳤는데, 그는 난 치는 법을 예서 쓰는 법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그의 서화관은 문자향과 서권기에 녹아 손끝에서 피어난다는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었다.

위치정보(김정희묘)

  • 김정희의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참고자료 및 추천자료

"김정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석문(금석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파" - <우리역사넷>

관련자료

인물 김정희
작품 김정희 필 난맹첩 김정희 필 차호호공
학문 북학파
예술 추사체
기거지(유배) 봉은사

작성자

  • 이재호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