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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최남선]]이 서로의 얼굴을 익혔던 것은 그들 나이 15세, 17세 때의 일이다.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둘은 미국에서 온 청년 [[안창호]]가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참석할 당시 마주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홍명희]]의 소개로 세 수재는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이광수]]를 알게 된다. 후에 [[최남선]]과 인연이 닿게 된 [[홍명희]]가 둘을 연결시켜주어 비로소 [[동경삼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이 서로의 얼굴을 익혔던 것은 그들 나이 15세, 17세 때의 일이다.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둘은 미국에서 온 청년 [[안창호]]가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참석할 당시 마주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홍명희]]의 소개로 세 수재는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이광수]]를 알게 된다. 후에 [[최남선]]과 인연이 닿게 된 [[홍명희]]가 둘을 연결시켜주어 비로소 [[동경삼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열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란 [[이광수]]에게 그 둘은 엄청난 버팀목이 되었으며, [[최남선]]과 [[홍명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거리낌이나 편견 없이 잘 어울렸다. 당시 이미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남선]]의 잡지 「소년」에는 [[이광수]]와 [[홍명희]] 정도만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각별했다. 세 사람은 동경 유학 시절을 보내며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고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만나면 항상 이와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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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란 [[이광수]]에게 그 둘은 엄청난 버팀목이 되었으며, [[최남선]]과 [[홍명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거리낌이나 편견 없이 잘 어울렸다. 당시 이미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남선]]의 잡지 [[「소년」]]에는 [[이광수]]와 [[홍명희]] 정도만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각별했다. 세 사람은 동경 유학 시절을 보내며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고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만나면 항상 이와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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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일) 20:17 판


요약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일본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조선의 신문학을 건설하고 문명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 세 인물을 일컬어 '동경삼재'라 부른다.

관계

이광수최남선이 서로의 얼굴을 익혔던 것은 그들 나이 15세, 17세 때의 일이다.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둘은 미국에서 온 청년 안창호가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참석할 당시 마주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홍명희의 소개로 세 수재는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이광수를 알게 된다. 후에 최남선과 인연이 닿게 된 홍명희가 둘을 연결시켜주어 비로소 동경삼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열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란 이광수에게 그 둘은 엄청난 버팀목이 되었으며, 최남선홍명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거리낌이나 편견 없이 잘 어울렸다. 당시 이미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남선의 잡지 「소년」에는 이광수홍명희 정도만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각별했다. 세 사람은 동경 유학 시절을 보내며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고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만나면 항상 이와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활동

관련항목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