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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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한자''' || 朴泰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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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데뷔''' || 1930년 <신생> 10월호 단편소설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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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생몰년''' || 1910~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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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출생지''' || 경성부 다옥정 7번지(현 서울 중구 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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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직업''' || 소설가, 번역가,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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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학력''' ||  호세이대학교 예과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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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활동분야''' || 소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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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활동분야''' || 소설, 번역,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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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관련단체''' || [[구인회]]  
 
| style="text-align:center;"|'''관련단체''' || [[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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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대표 월북 문인 작가 박태원(朴泰遠)은 1910년 1월 7일(음력 1909년 12월 7일)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에 위치한 호세이(法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박태원은 1930년 호세이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고모의 도움으로 현대소설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이광수’를 만나 문학 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 해(1930)에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그러나 프로 문단의 지나친 정치성에 염증을 느낀 박태원은 시인 이상과 함께 1933년 구인회에 입적하여 그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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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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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월북문인 작가 박태원(朴泰遠)은 1910년 1월 7일(음력 1909년 12월 7일) 경성부 다옥정 7번지(현 서울 중구 다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6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구인회 : 1933년에 결성된 문학 친목단체. 경향주의문학에 반하여 순수예술을 추구하며 문학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옹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인회의 일원으로는 유치진, 이태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유정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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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그의 작품들인 『[[천변풍경]], 『[[성탄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은 30년대적 모더니즘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경성 거리를 배회하는 당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평론가 최재서는 이상(李箱)의 소설과 박태원의 이러한 소설들을 두고 우리 소설에 리얼리즘의 확대 심화를 가져온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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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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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호세이대학에 유학을 갔던 박태원은 1930년 중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고모의 도움으로 현대소설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이광수]]’를 만나 문학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서울로 돌아온 그 해,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으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프로 문단의 지나친 정치성에 염증을 느낀 박태원은 시인 ‘[[이상]]’과 함께 1933년 [[구인회]]에 입적하고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작품활동을 이어가면서도 [[구인회]] 회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박태원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상이 ‘하융’이란 필명으로 그린 삽화와 함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하면서 당시 한국 문단에서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천변풍경』, 『여인성장』과 『성탄제』 등을 발표하며 근대 시기 도시 서울의 풍속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소설화한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작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박태원은 구인회 회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특히 우리에게 『달밤』이라는 작품으로 친숙한 작가 이태준, 강한 실험정신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열정을 가졌던 시인 이상과 각별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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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 1933년에 결성된 문학 친목단체. 경향주의문학에 반하여 순수예술을 추구하며 문학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옹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인회]]의 일원으로는 [[유치진]], [[이태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유정]] 등이 있었다.
  
1950년 박태원은 6·25 동란 중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월북하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사실 박태원은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당시 명동의 거리를 활보하며 최고의 모던 보이로 소문났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월북 작가들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많았고 그의 월북 사유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실제로 박태원이 어떤 목적과 방식으로 월북을 하였는지 그 정황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구인회 활동을 하며 절친했던 이용악, 이태준, 오장환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 1950년 7월경 남한에서 박태원을 보았다는 소설가 조용만의 증언이 박태원에 대한 마지막 증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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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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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박태원은 6·25 동란 중 월북했다고 추측된다. 사실 박태원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당시 명동 거리를 활보하며 최고의 모던보이로 소문났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월북 작가들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많으며 그의 월북 사유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실제로 박태원이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월북하였는지 그 정황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전쟁이 발발한 직후 서울로 온 [[이용악]], [[이태준]], [[오장환]]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 1950년 7월경 남한에서 박태원을 보았다는 소설가 [[조용만]]의 증언이 박태원에 대한 마지막 증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울에 부인과 2남 3녀를 남긴 채 혼자 월북을 택했고, 6·25전쟁이 지속되던 1951년 아우 '[[박문원]]'도 그를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이 커다란 전환 맞이하게 된 것은 해방공간 속에서의 좌익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문학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박태원은 서울에 부인과 2남 3녀를 남긴 채 혼자 월북을 택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1년 박태원의 아우 박문원과 당시 중학생이던 의붓딸 정태은도 그를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월북 직후 인민군을 따라 종군작가로 나서서 전쟁터의 참혹함 속에서 이전의 자신 및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반평생을 잘못 살았던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편들인 『조국의 품』, 『리순신장군』, 『조국의 기발』 등을 써내는 한편 시조 시인인 조운과 공동으로 『조선창극집』을 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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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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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월북 이전, 박태원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남로당 계열의 문예운동에 몸을 담갔으나 월북 이전이었기에 처형을 모면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었다. 그의 삶이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해방공간 속에서 좌익을 선택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의 문학에 녹아든 것은 6·25전쟁을 겪으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초기 북한사회를 뒤흔든 하나의 중요한 사건에 의해 지연된다. 1956년 초에 일어난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작업의 문학적 표현인 ‘림화 리태준’에 대한 단죄는 박태원에게도 또한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당시 북에서는 남로당 계열 숙청 이후 잔존파인 이태준을 제거하고자 했고, 이태준과 동인이었던 박태원 또한 결국 구인회 시절에 대한 자기비판을 하게 되었고, 월북한 것을 슬퍼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태원은 결국 이 사건으로 남로당 계열로 몰려 문학적,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4년 간 평남 강서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강제노동을 하게 된다. 이 시기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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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구금시설을 접수하면서 풀려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박태원이라는 게 권영희의 증언이다. 박태원은 월북 직후 인민군을 따라 종군작가로 나섰다. 전쟁터의 참혹함 속에서 그는 이전의 자신 및 자신의 세계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인다. “반평생을 잘못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고 자신에게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편들인 『[[조국의 품]]』, 『[[리순신장군]]』, 『[[조국의 기발]]』 등을 써내는 한편 시조 시인인 [[조운]]과 공동으로 『[[조선창극집]]』을 펴내기도 한다.
  
1960년에 다시금 작가로 복귀했을 때, 박태원은 이미 심한 영양실조와 함께 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가 앓았던 병은 시신경 위축에 색소성 망막염으로 불치의 병이었다. 이로써 그가 급기야 실명(失明)에 이르는 것은 1965년의 일이다. 그리고 박태원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1975년에는 전신불수의 처지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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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남조선노동당]]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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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 :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시기 박태원은 병마와 싸우며 대하 역사 소설을 집필하였다. 병상에 누워 있어 직접 글을 쓸 수 없었던 박태원 대신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구술을 받아 적어 완성된 소설이 바로 북한 최고의 역사 소설로 손꼽히는 『갑오농민전쟁』이다. 그와 재혼한 아내 권영희는 박태원의 경성제일고보 동창이자 구인회 동료였던 정인택의 아내로, 정인택 사후 1956년 박태원과 재혼하였다. 또한 과거 권영희는 박태원의 절친한 친구로 유명했던 시인 이상의 연인이기도 했다. 『갑오농민전쟁』은 1977년 초부터 집필되기 시작하였으며, 1984년 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의 3부작 중 마지막 3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87년에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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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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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태원의 이러한 시도는 초기 북한사회를 흔든 중요한 사건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1956년 초에 발생한 남로당 계열 사람들을 숙청하는 '[[8월 종파사건]]'은 박태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박태원은 문학적·정치적 숙청을 당하여 평남 강서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4년 간 추방되어 강제노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60년 작가로 복귀하기 이전 함흥 시골에 있는 소학교의 교장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박태원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박태원은 1986년 7월 10일 77살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사망하게 된다. 사망 시기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다르게 박태원의 경우 사망 후 <조선문학>에 부고 기사가 실렸기 때문에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앞에 북조선 작가동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추모의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던 재능 있는 작가 박태원 동지가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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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이와 같은 생애를 살아온 박태원의 필명은 몽보(夢甫)·구보(丘甫)·구보(仇甫)·구보(九甫)·박태원(泊太苑)이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 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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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이 1960년 작가로 다시 복귀했을 때, 이미 그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이어 시력을 잃고 있었다. 그가 앓았던 병은 시신경 위축에 색소성 망막염이었다. 결국 그는 1965년 실명하게 되었고, 1975년에는 전신불수의 처지가 되고 만다.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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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 박태원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대하 역사소설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직접 글을 쓸 수는 없었고, 대신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구술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바로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여겨지는 『[[갑오농민전쟁]]』이다. 『[[갑오농민전쟁]]』은 1977년 초부터 집필되기 시작하였으며, 1984년 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의 3부작 마지막 3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87년에 출판된다.
1909년(1세) 1월 6일 서울 수중 박골(지금의 수송동)에서 4남 2녀 차남으로 출생.
 
  
1918년(10세) 경성사범 부속보통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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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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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은 1986년 7월 10일, 77살의 나이에 직접적 사인인 고혈압으로 사망하게 된다. 사망 시기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다르게 박태원의 경우 사망 후 <조선문학>에 부고 기사가 실렸기 때문에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앞에 북조선 작가동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추모의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던 재능 있는 작가 박태원 동지가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1922년(14세) 보통학교 제 4학년 수료 후, 입학시험을 봐 4월 22일 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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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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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 부속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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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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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이대학교 예과 (중퇴)
  
1926년(18세) 의사인 숙부와 고모(이화여고 교원)가 문인들과 교분이 깊어, 그들의 소개로 춘원 이광수, 백화 양건식에게 지도를 받게 됨. 제일고보 재학 중 이던 당시에 『조선문단』에 시「누님」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공식적으로 데뷔. 그 후 <동아일보>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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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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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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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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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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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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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문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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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시골 소학교 교장
  
1930년 (22세) 동경법정대학 예과 입학.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 예술과 신심리주의의 문학에 경도됨. 단편 소설「수염」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수필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
+
===연보===
  
1933년 (25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 「낙조」「옆집색시」「피로」「오월의 훈풍」등 많은 작품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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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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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0%|연도||style="width:80%"|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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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생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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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1세)'''|| 1월 6일 서울 다옥정 7번지에서 부 박용환(朴容桓)의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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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10세)'''||경성사범 부속보통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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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14세)'''||보통학교 제 4학년 수료 후, 입학시험을 봐 4월 22일 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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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18세)'''||의사인 숙부와 고모(이화여고 교원)가 문인들과 교분이 깊어, 그들의 소개로 춘원 [[이광수]], 백화 [[양건식]]에게 지도를 받게 됨. 제일고보 재학 중 이던 당시에 <조선문단>에 시「[[누님]]」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공식적으로 데뷔. 그 후 <동아일보>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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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22세)'''||동경법정대학 예과 입학 및 중퇴.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 예술과 신심리주의의 문학에 경도됨. 단편 소설「[[수염]]」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수필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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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5세)'''||[[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 「[[낙조]]」, 「[[옆집색시]]」, 「[[피로]]」, 「[[오월의 훈풍]]」등 많은 작품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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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6세)'''||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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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8세)'''||1월 16일 오후 4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맏딸 출생 (이날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서웁게 춥던 날인데 아버지가 되는 시간에 다방 낙랑에서 시인 이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결혼 5년의 감상」에서 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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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9세)'''||7월 30일 서울 관동(지금의 교북동) 12번지 4호에서 둘째딸 소영(영화감독 '[[봉준호]]'의 어머니)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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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0세)'''||장편 소설집 『[[천변풍경]]』과 단편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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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31세)'''||9월 27일(음력 8월 15일)에 서울 예지동 121번지에서 맏아들 일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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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32세)'''||서울 돈암동에 집터를 마련. 새로 집을 짓고 솔거하여 이사. 문장에 장편소설 『[[애경]]』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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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3세)'''||<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지]]』를 <신시대>에 연재. 「[[투도]]」를 <조광>에,「[[채가]]」를 <문장>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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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34세)'''||1월 15일 서울 돈암동 487번지 22호에서 둘째아들 재영 출생. <조광>에서 중국 소설 「[[수호]]전」을 3년에 걸쳐 연재. 장편소설집 『[[여인성장]]』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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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7세)'''||[[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으로 선정. <매일신보>에 장편 『[[원적]]』을 연재하다 76회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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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8세)'''||<조선주보>에 장편 『[[약탈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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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9세)'''||장편소설 『[[홍길동전]]』출간. 7월 24일 셋째 딸 은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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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0세)'''||[[국민보도연맹]]에 가담하여 전향 성명서 발표. 성북동 39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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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1세)'''||<조선일보>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을 6월 15일~ 50년 5월 2일까지 발표. 종군 기자로 활동(1부만 완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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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2세)'''||6.25 동란 중 월북.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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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48세)'''||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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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2세)'''||작가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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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7세)'''||전신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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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9세)'''||망막염으로 인한 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을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1부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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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8세)'''||북한 <조선문학> 7월호에서 박태원이 고혈압에 시달리다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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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26세) 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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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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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은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이자 근대시기 도시 서울의 풍속 변화를 민감하게 소설화한 작가로 여겨진다. 근대주의자였던 그는 식민지 근대를 비판하였고, 고통 받는 당대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직면한 모순이었지만, 박태원은 주변 소시민들의 생활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1936년 (28세) 1월 16일 오후 4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맏딸 출생 (이날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서웁게 춥던 날인데 아버지가 되는 시간에 다방 낙랑에서 시인 이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결혼 5년의 감상」에서 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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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인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경성거리를 배회하는 당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박태원은 소시민들의 삶과 현실을 무기력한 패배자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그대로 그려나갔다. 그의 소설들은 소시민적 우울을 다뤘다는 점에서 대체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 ‘최재서’는 박태원의 이러한 작품세계에 대해 우리 소설에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1937년 (29세) 7월 30일 서울 관동(지금의 교북동) 12번지 4호에서 둘째딸 소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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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박태원의 작품들은 소설 속에 한자가 많이 섞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면의 복합적 구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박태원은 쉼표를 사용하여 장문을 시도하였고, 작품의 형식과 문장 기교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특징은 소설가 박태원이 예술파적 소설을 지향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태원은 ‘[[이광수]]’처럼 계몽주의적 현실관을 지녔을 뿐, ‘[[이효석]]’처럼 예술지상주의로 기울진 않았다.
  
          조광에 『속 천변풍경』을 연재.「성군」을 조광에,「성탄제」를 여성에 발표.
 
1938년 (30세) 장편 소설집 『천변풍경』과 단편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간.
 
  
          『명랑한 전망』을 매일신보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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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1939년 (31세) 9월 27일(음력 8월 15일)에 서울 예지동 121번지에서 맏아들 일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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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50%|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style="width:50%"|천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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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비련」(여성), 「윤초시의 상경」,「가정의 벗」,「골목 안」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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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설가구보씨의일일삽화.jpg|300px|left]]|| [[파일:천변풍경삽화.jpg|150px]]
          『박태원 단편집』, 『지나소설집』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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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32세) 서울 돈암동에 집터를 마련. 새로 집을 짓고 솔거하여 이사. 문장에 장편소설 『애경』연재.
 
 
 
1941년 (33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 지』를 신시대에 연재. 「투도」를 조광에,「채가」를 문장에 발표.
 
 
 
1942년(34세) 1월 15일 서울 돈암동 487번지 22호에서 둘째아들 재영 출생. 『조광』에서 중국 소설 「수호전」을 3년에 걸쳐 연재. 장편소설집 『여인성장』을 출간. 1945년 (37세)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으로 선정. 매일신보에 장편 『원적』을 연재하다 76회로 중단.
 
 
 
1946년 (38세) 『조선주보』에 장편 『약탈자』 연재.
 
 
 
1947년 (39세) 장편소설 『홍길동전』출간. 7월 24일 셋째 딸 은영 출생.
 
 
 
1948년 (40세) 보도연맹에 가담하여 전향 성명서 발표. 성북동 39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사.
 
 
 
1949년 (41세) <조선일보>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을 6월 15일~ 50년 5월 2일까지 발표. 종군 기자로 활동(1부만 완성됨).
 
 
 
1950년 (42세) 6.25 동란 중 월북.
 
 
 
북한에서의 활동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국내 신문 잡지 가족들의 증언 등을 통하여 알려진 상황을 수집 정리한 것.
 
1960년 (52세) 작가로 복귀
 
 
 
1977년 (69세) 망막염으로 인한 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을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1부 완성.
 
 
 
1986년 (78세) 북한 『조선문학』 7월호에는 박태원이 고혈압에 시달리다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
 
 
 
==작품세계 (활동내역) ==
 
작가(예술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이곳에 기술합니다.
 
 
 
 
 
작가가 아닌 사람의 경우에는 주요한 업적을 중심으로 기술합니다.
 
  
 
==작품 및 저서==
 
==작품 및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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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갑오농민전쟁 제3부, 문예출판사, 1986
 
31. 갑오농민전쟁 제3부, 문예출판사, 1986
 
==기타(수상내역 등)==
 
 
 
위 항목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해당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기술합니다.
 
 
 
==관련 콘텐츠==
 
 
  
 
==박태원 연구 결과물==
 
==박태원 연구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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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인물
 
   
 
   
배개화. (2008). 문장지 시절의 박태원. 우리말글, 44, 251-282.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108764&language=ko_KR 배개화. (2008). 문장지 시절의 박태원. 우리말글, 44, 251-282.]
  
 
   
 
   
 
*시대상
 
*시대상
 
   
 
   
박진숙. (2009). 박태원의 통속소설과 시대의 ‘명랑성’. 한국현대문학연구, 27, 20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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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250584 박진숙. (2009). 박태원의 통속소설과 시대의 ‘명랑성’. 한국현대문학연구, 27, 207-239.]
 
   
 
   
권은. (2010). 식민지적 어둠의 심연: 박태원의 [적멸] 론. 한국근대문학연구, (22), 115-144.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545771&language=ko_KR 권은. (2010). 식민지적 어둠의 심연: 박태원의 적멸 론. 한국근대문학연구, (22), 115-144.]
 
   
 
   
  
 
*소설연구
 
*소설연구
 
   
 
   
박태원. (2015). [박태원 작품선 (소설)] 理髮所. 문예운동, 56-63.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234314&language=ko_KR 박태원. (2015). 박태원 작품선 (소설). 理髮所. 문예운동, 56-63.]
  
이은선. (2010).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주체-타자 연구 Ⅱ. 구보학보, 5, 381-407.
+
[http://scholar.dkyobobook.co.kr/searchDetail.laf?barcode=4010023267225 이은선. (2010).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주체-타자 연구 Ⅱ. 구보학보, 5, 38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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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이. (2014). 박태원의 소년소설에 대한 고찰. 구보학보, 10, 8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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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holar.dkyobobook.co.kr/searchDetail.laf?barcode=4010023268222 안숙원. (2010). 박태원과 소설의 여성화. 구보학보, 5, 295-316. ]
 
김미지. (2007). 박태원 소설의 쾌락 원천으로서 유머와 놀이. 구보학보, 2, 83-112.  
 
  
김학면. (2006).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시선’과 ‘기억’. 구보학보, 1, 7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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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숙. (2006).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신체제 수용 양상. 구보학보, 1, 17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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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희. (2015). 박태원의 유머소설과 서술전략. 구보학보, 12, 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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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동. (2014).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소비주체의 욕망과 갈등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56, 277-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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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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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667875&language=ko_KR 김흥식. (2005). 박태원의 소설과 고현학. 한국현대문학연구, 18, 327-358. ]
  
안미영. (2010). 박태원의 자화상 소설에 나타난 가족주의의 의의. 구보학보, 5, 26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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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1990). 박태원 초기소설연구. 우리말글, 28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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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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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름. (2018). 박태원 소설에 드러난 산책자의 문체 표상. 우리문학연구, 60, 261-290. 이은선. (2010). 박태원 소설과 “재현” 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293-316.
 
  
윤정헌. (1993). 박태원 역사소설 연구. 한민족어문학, 24, 157-181.
+
*특정작품
  
김정화. (2015). 현대문학: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동경 체험의 양상 고찰. 우리어문연구, 51, 331-360.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52341&language=ko_KR 이화진. (2001).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론-구보 소설의 창작원리와 그 의미. 어문학, 353-377. ]
  
이강언. (2002). 박태원 소설의 도시와 도시 인식. 우리말글, 289-306.  
+
[http://s-space.snu.ac.kr/handle/10371/129681 전정은. (2012). 문학작품을 통한 1930 년대 경성중심부의 장소성 해석: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을 바탕으로 (Doctoral dissertation, 서울대학교 대학원).]
 +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670504&language=ko_KR 김근호. (2014).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 의 서사적 재미. 현대소설연구, (56), 69-95. ]
  
김윤희. (2007). 박태원 소설의 희곡적․ 연극적 변용· 가능성에 관한 일고찰. 구보학보, 2, 113-140.
 
  
 +
*별도자료
 +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582075&language=ko_KR 박배식. (2004). 모더니즘 소설의 영화 기법-박태원을 중심으로. 비평문학, (19), 123-140. 이경림. (2010). 초기 박태원 소설과 이상 소설에 나타나는 공통 모티프에 관한 연구. 구보학보, 6, 71-100. 박태원 관련콘텐츠]
  
*응용
+
==관련 인물==
 +
*[[권영희]]
 +
*[[김기림]]
 +
*[[봉준호]]
 +
*[[양건식]]
 +
*[[오장환]]
 +
*[[이광수]]
 +
*[[이상]]
 +
*[[이용악]]
 +
*[[이태준]]
 +
*[[이효석]]
 +
*[[정지용]]
 +
*[[조용만]]
  
한수영. (2005). 박태원 소설에서의 근대와 전통-‘합리성’에 대한 인식과 ‘신체제론’수용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7, 227-256.
+
==관련 콘텐츠==
  
김흥식. (2005). 박태원의 소설과 고현학. 한국현대문학연구, 18, 327-358.
+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김근호. (2013). 박태원 소설과 창작교육. 구보학보, 143-170.
+
<youtube>qACir--AY7I</youtube>
  
문흥술. (1994). 의사 탈근대성과 모더니즘: 박태원 론. 외국문학, (38), 132-147.  
+
이 연극은 1930년대 경성을 되살려내었다. 그 시대의 사진과 역사적 사실을 각주로 삼아 관객의 이해를 도우며, 소설을 그대로 읊어대고 그 위에 몸을 맡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 연극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졌던 원작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연극에서는 박태원의 소설 속 텍스트로 언급된 음악을 실제로 구현하고 현대적 주석이나 숨어있는 행간의 의미를 장면화 하는 등 소설을 영상, 음악, 조명 등으로 이미지화 하였으며, 원작의 문장 또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정현숙. 1930 년대 도시 공간과 박태원 소설. 김종회, & 강헌국. (2007). 일제강점기의 박태원 문학.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자료집, 114-122.
 
 
김명석. (2015). 어문학: 박태원 소설의 해외 번역 출판 연구. 인문학연구, 50, 7-38.
 
  
공종구. (2002). 박태원의 지식인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근대. 현대소설연구, (16), 207-221.
+
*문학사상 2004년 8월호
  
오양진. (2016). < 박태원 추리 소설의 삽화 양상 연구> 토론문. 국제어문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17-18.  
+
[[파일:8월호1.gif|8월호1.gif]]
  
김미현. (2013). 박태원 소설의 감성과 이데올로기-< 명랑한 전망> 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51, 369-395.
+
문예잡지인 문학사상 2004년 8월호의 표지이며, 박태원의 의붓딸인 문필가 정태은이 북한에서 간행되었던 계간지 통일문학 2000년 3월호와 6월호에 두 번 연재했던 글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 실려있다.
 
오금화. (2017).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경성 거리의 생태학 (Doctoral dissertation,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현숙. (2006). 1930 년 도시 공간과 박태원 소설. 현대소설연구, (31), 53-72.
 
  
 +
*구보, 다시 청계천을 읽다
  
*구인회
+
[[파일:청계천.jpg]]
 
강상희. (1995). [총론: 박태원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구인회'와 박태원의 문학관. 상허학보, 2, 33-54.
 
 
 
  
*특정작품
+
2009년 청계천 광장에서 박태원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9명의 작가들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을 모티브로 그림 30여 점을 전시하였다.
  
이화진. (2001).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론-구보 소설의 창작원리와 그 의미. 어문학, 353-377.
 
  
전정은. (2012). 문학작품을 통한 1930 년대 경성중심부의 장소성 해석: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을 바탕으로 (Doctoral dissertation, 서울대학교 대학원).
+
*소설「[[천변풍경]]」을 소재로 한 기획전시
 
김근호. (2014).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 의 서사적 재미. 현대소설연구, (56), 69-95.
 
  
 +
[[파일:천변풍경전시.jpg]]
  
*별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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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청계천박물관에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소재로 한 기획전시가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1930년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던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살아가던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였다.
 
박배식. (2004). 모더니즘 소설의 영화 기법-박태원을 중심으로. 비평문학, (19), 123-140. 이경림. (2010). 초기 박태원 소설과 이상 소설에 나타나는 공통 모티프에 관한 연구. 구보학보, 6, 71-100. 박태원 관련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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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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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환. (2013). 박태원 역사소설 연구의 현황과 전망. 구보학보. 83-109.
 
*유승환. (2013). 박태원 역사소설 연구의 현황과 전망. 구보학보. 8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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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7) 박태원 ‘골목 안’,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061943525&code=900308
  
 
*연합뉴스, '구보 박태원'이 안내하는 시간여행…'천변풍경' 특별전, https://www.yna.co.kr/view/AKR20180504045500004?input=1195m
 
*연합뉴스, '구보 박태원'이 안내하는 시간여행…'천변풍경' 특별전, https://www.yna.co.kr/view/AKR20180504045500004?input=1195m
  
*천지일보, 연극 ‘구보씨의 1일’ 소설문체로 들여다보기,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6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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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미디어 핫 토픽] 봉준호 감독,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90531.010220819040001
  
 
*조선일보, 월북지식인들의 행로 (9) 박태원,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4654
 
*조선일보, 월북지식인들의 행로 (9) 박태원,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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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연극 ‘구보씨의 1일’ 소설문체로 들여다보기,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61883
  
 
==작성자 및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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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16:03 기준 최신판



생애

출생

대표 월북문인 작가 박태원(朴泰遠)은 1910년 1월 7일(음력 1909년 12월 7일) 경성부 다옥정 7번지(현 서울 중구 다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6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문단 데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호세이대학에 유학을 갔던 박태원은 1930년 중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고모의 도움으로 현대소설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이광수’를 만나 문학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서울로 돌아온 그 해,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으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프로 문단의 지나친 정치성에 염증을 느낀 박태원은 시인 ‘이상’과 함께 1933년 구인회에 입적하고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작품활동을 이어가면서도 구인회 회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월북

1950년 박태원은 6·25 동란 중 월북했다고 추측된다. 사실 박태원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당시 명동 거리를 활보하며 최고의 모던보이로 소문났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월북 작가들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많으며 그의 월북 사유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실제로 박태원이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월북하였는지 그 정황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전쟁이 발발한 직후 서울로 온 이용악, 이태준, 오장환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 1950년 7월경 남한에서 박태원을 보았다는 소설가 조용만의 증언이 박태원에 대한 마지막 증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울에 부인과 2남 3녀를 남긴 채 혼자 월북을 택했고, 6·25전쟁이 지속되던 1951년 아우 '박문원'도 그를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삶의 전환

광복 후 월북 이전, 박태원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남로당 계열의 문예운동에 몸을 담갔으나 월북 이전이었기에 처형을 모면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었다. 그의 삶이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해방공간 속에서 좌익을 선택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의 문학에 녹아든 것은 6·25전쟁을 겪으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구금시설을 접수하면서 풀려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박태원이라는 게 권영희의 증언이다. 박태원은 월북 직후 인민군을 따라 종군작가로 나섰다. 전쟁터의 참혹함 속에서 그는 이전의 자신 및 자신의 세계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인다. “반평생을 잘못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고 자신에게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편들인 『조국의 품』, 『리순신장군』, 『조국의 기발』 등을 써내는 한편 시조 시인인 조운과 공동으로 『조선창극집』을 펴내기도 한다.

  • 남로당 :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남조선노동당의 줄임말.
  • 국민보도연맹 :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숙청

그러나 박태원의 이러한 시도는 초기 북한사회를 흔든 중요한 사건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1956년 초에 발생한 남로당 계열 사람들을 숙청하는 '8월 종파사건'은 박태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박태원은 문학적·정치적 숙청을 당하여 평남 강서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4년 간 추방되어 강제노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60년 작가로 복귀하기 이전 함흥 시골에 있는 소학교의 교장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박태원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복귀

박태원이 1960년 작가로 다시 복귀했을 때, 이미 그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이어 시력을 잃고 있었다. 그가 앓았던 병은 시신경 위축에 색소성 망막염이었다. 결국 그는 1965년 실명하게 되었고, 1975년에는 전신불수의 처지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 박태원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대하 역사소설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직접 글을 쓸 수는 없었고, 대신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구술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바로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여겨지는 『갑오농민전쟁』이다. 『갑오농민전쟁』은 1977년 초부터 집필되기 시작하였으며, 1984년 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의 3부작 중 마지막 3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87년에 출판된다.

사망

박태원은 1986년 7월 10일, 77살의 나이에 직접적 사인인 고혈압으로 사망하게 된다. 사망 시기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다르게 박태원의 경우 사망 후 <조선문학>에 부고 기사가 실렸기 때문에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앞에 북조선 작가동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추모의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던 재능 있는 작가 박태원 동지가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학력

  • 경성사범 부속보통학교
  • 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
  • 호세이대학교 예과 (중퇴)

경력

연보

연도 내용
박태원의 생애 연표
1909년(1세) 1월 6일 서울 다옥정 7번지에서 부 박용환(朴容桓)의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
1918년(10세) 경성사범 부속보통학교 입학.
1922년(14세) 보통학교 제 4학년 수료 후, 입학시험을 봐 4월 22일 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 입학.
1926년(18세) 의사인 숙부와 고모(이화여고 교원)가 문인들과 교분이 깊어, 그들의 소개로 춘원 이광수, 백화 양건식에게 지도를 받게 됨. 제일고보 재학 중 이던 당시에 <조선문단>에 시「누님」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공식적으로 데뷔. 그 후 <동아일보>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1930년 (22세) 동경법정대학 예과 입학 및 중퇴.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 예술과 신심리주의의 문학에 경도됨. 단편 소설「수염」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수필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
1933년 (25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 「낙조」, 「옆집색시」, 「피로」, 「오월의 훈풍」등 많은 작품을 발표.
1934년 (26세) 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와 결혼.
1936년 (28세) 1월 16일 오후 4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맏딸 출생 (이날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서웁게 춥던 날인데 아버지가 되는 시간에 다방 낙랑에서 시인 이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결혼 5년의 감상」에서 술회.)
1937년 (29세) 7월 30일 서울 관동(지금의 교북동) 12번지 4호에서 둘째딸 소영(영화감독 '봉준호'의 어머니) 출생.
1938년 (30세) 장편 소설집 『천변풍경』과 단편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간.
1939년 (31세) 9월 27일(음력 8월 15일)에 서울 예지동 121번지에서 맏아들 일영 출생.
1940년 (32세) 서울 돈암동에 집터를 마련. 새로 집을 짓고 솔거하여 이사. 문장에 장편소설 『애경』연재.
1941년 (33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지』를 <신시대>에 연재. 「투도」를 <조광>에,「채가」를 <문장>에 발표.
1942년(34세) 1월 15일 서울 돈암동 487번지 22호에서 둘째아들 재영 출생. <조광>에서 중국 소설 「수호전」을 3년에 걸쳐 연재. 장편소설집 『여인성장』을 출간.
1945년 (37세)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으로 선정. <매일신보>에 장편 『원적』을 연재하다 76회로 중단.
1946년 (38세) <조선주보>에 장편 『약탈자』 연재.
1947년 (39세) 장편소설 『홍길동전』출간. 7월 24일 셋째 딸 은영 출생.
1948년 (40세) 국민보도연맹에 가담하여 전향 성명서 발표. 성북동 39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사.
1949년 (41세) <조선일보>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을 6월 15일~ 50년 5월 2일까지 발표. 종군 기자로 활동(1부만 완성됨).
1950년 (42세) 6.25 동란 중 월북.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
1956년 (48세)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됨
1960년 (52세) 작가로 복귀
1975년 (67세) 전신불수
1977년 (69세) 망막염으로 인한 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을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1부 완성.
1986년 (78세) 북한 <조선문학> 7월호에서 박태원이 고혈압에 시달리다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

작품세계

박태원은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이자 근대시기 도시 서울의 풍속 변화를 민감하게 소설화한 작가로 여겨진다. 근대주의자였던 그는 식민지 근대를 비판하였고, 고통 받는 당대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직면한 모순이었지만, 박태원은 주변 소시민들의 생활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인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경성거리를 배회하는 당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박태원은 소시민들의 삶과 현실을 무기력한 패배자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그대로 그려나갔다. 그의 소설들은 소시민적 우울을 다뤘다는 점에서 대체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 ‘최재서’는 박태원의 이러한 작품세계에 대해 우리 소설에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박태원의 작품들은 소설 속에 한자가 많이 섞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면의 복합적 구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박태원은 쉼표를 사용하여 장문을 시도하였고, 작품의 형식과 문장 기교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특징은 소설가 박태원이 예술파적 소설을 지향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태원은 ‘이광수’처럼 계몽주의적 현실관을 지녔을 뿐, ‘이효석’처럼 예술지상주의로 기울진 않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 천변풍경
소설가구보씨의일일삽화.jpg
천변풍경삽화.jpg

작품 및 저서

  • 구보 박태원 작품집

1.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문장사, 1938.12. 7


2. 천변풍경, 박문서관, 1938. 3(1차) 1947. 5. 1(2차)


3. 지나 소설집, 합자회사 인문사, 1939. 4. 17


4. 여인 성장, 매일신보사, 1942


5. 군국의 어머니, 조광사, 1942


6. 아름 다운 봄, 영창서관, 1942


7. 중국 동화집, 정음사, 1946 1


8. 중등 문범, 정음사, 1946


9. 조선 독립순국열사전, 유문각, 1946


10. 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1


11. 홍길동전, 조선 금융조합연합회, 1947. 11


12. 성탄제, 을유문화사, 1948. 2. 10


13. 중국소설선 I. 정음사, 1948. 2. 11


14. 중국소설선 II, 정음사, 1948. 3. 20


15. 금은탑, 한성도서, 1948 |


16. 수호지, 정음사


17. 삼국지, 정음사


18. 리순신 장군전, 국립출판사, 1959


19. 조선창극집, 국립 출판사 1955


20. 리순신 장군이야기, 국립출판사, 1955 1


21. 정수동 일화집 1955. 국립 출판사


22. 야담집 1955. 국립출판사


23. 심청전, 문학예술 서적출판사, 1958 1


24. 삼국연의, 문학예술서적 출판사, 1959 1


25 만화 갑오농민전쟁 그림: 홍종원 1960. 2. 20, 국립미술출판사


26. 임진조국전쟁, 문학예술 서적출판사, 1960 1


27.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부 1권 문예출판사, 1965


28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부 2권 문예출판사, 1966


29. 갑오농민전쟁 제1부, 문예출판사, 1974


30. 갑오농민전쟁 제2부, 문예출판사, 1980


31. 갑오농민전쟁 제3부, 문예출판사, 1986

박태원 연구 결과물

  • 인물

배개화. (2008). 문장지 시절의 박태원. 우리말글, 44, 251-282.


  • 시대상

박진숙. (2009). 박태원의 통속소설과 시대의 ‘명랑성’. 한국현대문학연구, 27, 207-239.

권은. (2010). 식민지적 어둠의 심연: 박태원의 적멸 론. 한국근대문학연구, (22), 115-144.


  • 소설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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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호. (2015). 박태원 소설의 골목 표상과 이웃 생태학. 구보학보, 12,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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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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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진. (2016). < 박태원 추리 소설의 삽화 양상 연구> 토론문. 국제어문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17-18.

김미현. (2013). 박태원 소설의 감성과 이데올로기-< 명랑한 전망> 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51, 369-395.

정현숙. (2006). 1930 년 도시 공간과 박태원 소설. 현대소설연구, (31), 53-72.


  • 구인회

강상희. (1995). 총론: 박태원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구인회'와 박태원의 문학관. 상허학보, 2, 33-54.


  • 특정작품

이화진. (2001).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론-구보 소설의 창작원리와 그 의미. 어문학, 353-377.

전정은. (2012). 문학작품을 통한 1930 년대 경성중심부의 장소성 해석: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을 바탕으로 (Doctoral dissertation, 서울대학교 대학원).

김근호. (2014).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 의 서사적 재미. 현대소설연구, (56), 69-95.


  • 별도자료

박배식. (2004). 모더니즘 소설의 영화 기법-박태원을 중심으로. 비평문학, (19), 123-140. 이경림. (2010). 초기 박태원 소설과 이상 소설에 나타나는 공통 모티프에 관한 연구. 구보학보, 6, 71-100. 박태원 관련콘텐츠

관련 인물

관련 콘텐츠

  •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이 연극은 1930년대 경성을 되살려내었다. 그 시대의 사진과 역사적 사실을 각주로 삼아 관객의 이해를 도우며, 소설을 그대로 읊어대고 그 위에 몸을 맡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 연극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졌던 원작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연극에서는 박태원의 소설 속 텍스트로 언급된 음악을 실제로 구현하고 현대적 주석이나 숨어있는 행간의 의미를 장면화 하는 등 소설을 영상, 음악, 조명 등으로 이미지화 하였으며, 원작의 문장 또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 문학사상 2004년 8월호

8월호1.gif

문예잡지인 문학사상 2004년 8월호의 표지이며, 박태원의 의붓딸인 문필가 정태은이 북한에서 간행되었던 계간지 통일문학 2000년 3월호와 6월호에 두 번 연재했던 글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 실려있다.


  • 구보, 다시 청계천을 읽다

청계천.jpg

2009년 청계천 광장에서 박태원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9명의 작가들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을 모티브로 그림 30여 점을 전시하였다.


천변풍경전시.jpg

2018년 청계천박물관에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소재로 한 기획전시가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1930년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던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살아가던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였다.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박태원 구인회 A는 B의 소속이다
박태원 이태준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박태원 이효석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박태원 친일문학인 A는 B에 속해있다
박태원 백화 양건식 A는 B의 제자이다
박태원 이상 A는 B와 같은 소속이다
박태원 성탄제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조용만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박태원 김기림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박태원 의식의 흐름(기법) A는 B를 사용하였다
박태원 천변풍경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갑오농민전쟁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모더니즘 A는 B를 대표한다
박태원 도시서사 A는 B를 대표한다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정지용 A는 B와 같은 집단이다
박태원 홍길동전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조선문학건설본부 A는 B의 소속이다
박태원 조운 A는 B와 협업하였다
박태원 리순신장군전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군국의어머니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여인성장 A는 B를 집필하였다
박태원 평양문학대학 A는 B의 소속이었다
박태원 교수 A는 B이다

네트워크 그래프

박태원.PNG

  • 박태원에 관련된 객체들을 네트워크 그래프로 시각화한 이미지 파일이다.

참고문헌

  • 편집부. (1995). [부록3] 박태원 생애 연보. 상허학보. 441-443.
  • 백지혜. (2005). 박태원 소설의 사유방식과 글쓰기의 형식. 관악어문연구. 30, 231-246.
  • 유승환. (2013). 박태원 역사소설 연구의 현황과 전망. 구보학보. 83-109.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