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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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2월 23일 (수) 23:00 판 (고문헌 속 선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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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선잠단지소개.png


선잠단은 누에치기를 처음으로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양잠(養蠶)의 신으로 받들어 국가의례 선잠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왕조에서 선잠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1400년(정종2)부터 나타나며,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냈다. 1908년에는 신위를 사직단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어 '선잠단지'로 불린다.

역사

선잠단의 유래와 연혁

시기 내용 비고
1400 (정종2) 조선 왕조 최초 선잠제 시행(장소: 개경)
1401 (태종1) 선농과 선잠 악장 정비 논의
1411 (태종11) 선잠 폐백 제도 상정, 희생으로 돼지에 양도 더함 희생: 제사에 제물로 쓰이는 동물
1414 (태종14) 예조에서 선잠단의 제도와 규모를 확인함
1430 (세종12) 태종 후반기에 수정된 선잠단 체제를 확인하고 정비함
1475 (성종5) 『국조오례의』에 선잠제를 정비하여 수록
1797 (정조21) 선잠단 동쪽 계단의 칠을 보강함
1887 (고종24) 선잠단을 살피고 홍살문, 담장, 계단이 그대로임을 확인
1908 (융희2)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지고 선잠단지가 국유지로 이속됨
1939 사적 117호로 지정되면서 일부를 보호구역으로 결정
1963 사적 83호로 지정
2011 '서울 선잠단지'로 명칭 변경 2011.07.28 선잠단지 → 서울 선잠단지

고문헌 속 선잠

"선잠단, 동소문(東小門)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 세종실록 지리지 -

'사한이'는 성북동의 옛 이름이다.

"늦봄의 길한 뱀날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지낸다." - 『국조오례서례』-
"공경히 옛 법을 따라 제단을 모으도록 명하여 제사를 받드니 어찌 감히 소홀히
삼가 제수를 갖추어 잔을 올립니다. 이제 이 예를 올리는 것은 직접 솔선하는 데
뜻이 있사오니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우리나라를 도와주옵소서."
- 『서릉씨 작헌례의 어제제문』
『친잠의궤』 -


일제강점기의 선잠단지[1] 1982년 촬영한 선잠단지 [2] 1993년 선잠제 재현 당시 선잠단지의 모습 [3] 2015년에 촬영한 선잠단지 [4] 2022년에 직접 촬영한 선잠단지



고대 사회에서는 농업과 잠업이 사회 발전의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양잠을 처음 가르친 서릉씨를 '선잠(先蠶)'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삼국시대에 신라 왕실에서 누에치기를 권장한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잠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 꾸준히 시행되었으며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친잠 의식도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왕과 왕비는 솔선수범하여 농업과 잠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 해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왕이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내는 것처럼 잠업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며 잠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왕비였다. 하지만 왕비는 선잠단까지 가지 못했고 신하들이 대신 왕이 하사한 축문과 향을 받들고 선잠단에서 제사를 치렀다. 이러한 방식을 섭사라고 한다. 조선 왕조에서 선잠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1400년(정종2)부터 나타나며, 지금의 선잠단에서 선잠제를 시행한 것은 태종대 부터였다.

선잠제는 늦봄 음력 3월의 상서로운 뱀날에 지내는데, 음력 3월은 뽕잎이 나기 시작하므로 잠월(蠶月)이라고도 한다. 관상감에서 날짜를 정하면 예조에서 의례 준비를 하였다. 선잠제를 주관하는 관리들은 5일전부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제사를 준비하였다. 절차별 음악과 무용도 준비하고 규범과 법칙에 맞추어 희생, 폐백, 음식, 제기 등을 설치하였다. 선잠제는 의례 속에 음악, 노래, 무용 그리고 음식이 어우러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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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영상

<성북동 비디오 가이드(선잠단지/선잠박물관)> - 성북동주민자치회 2021. 12. 30. ...................<3년만에 재개 된 '선잠제' 양잠의 풍요 기원> - 서울경기케이블TV, 2021. 05. 21.

선잠박물관

작성자 및 기여자

출처

  1.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1079
  2. 동아일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891#modal
  3. 1993.05.12 동아일보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51200209127004&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5-1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168&publishType=00010
  4. 문화재청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1514&division=img
  5.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1079
  6. 동아일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891#modal
  7. 1993.05.12 동아일보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51200209127004&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5-1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168&publishType=0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