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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약한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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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출판년도'''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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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저자''' ||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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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분야'''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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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유형''' ||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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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성격''' ||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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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창작년도'''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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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시대''' ||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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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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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개요==
 
[[김동인]]의 처녀작이다. 1919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창조 創造≫ 1·2호에 발표되었다.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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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처녀작이다. 1919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창조 創造≫ 1·2호에 발표되었다.  
여학교에 다니는 강엘니자벳트는 K 남작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그에게 정조를 빼앗긴다. 그 후 그녀는 K 남작에게 애정을 느끼고 둘은 육체적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엘니자벳트가 임신을 하자 K 남작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낸다. 배신감을 느낀 엘니자벳트는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재판을 청구하나 재판에서 패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만다. 엘니자벳트는 이러한 시련이 자신의 약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강한 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전문==
+
작가의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문학적 성향을 알려주는 초기의 작품이다.
'''1'''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
문학에서 도덕적 가치를 말하기보다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효용성 있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주요하게 본 작가의 자연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하였는데.’
+
작품은 우리의 현실은 사회적으로나 신분상으로나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냉엄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 한테 가보여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
특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창작 태도가 엿보인다.
  
"아무래도 가보여야겠다.“
+
==줄거리==
  
그는 중얼거리고 외출의를 갈아입었다.
+
여학교에 다니는 강엘니자벳트는 K 남작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그에게 정조를 빼앗긴다.  
  
‘갈까? 그만둘까?’
+
그 후 그녀는 K 남작에게 애정을 느끼고 둘은 육체적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엘니자벳트가 임신을 하자 K 남작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낸다.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문 밖에 나섰다. 여학생간에 유행하는 보법(步法)으로 팔과 궁둥이를 전후좌우로 저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길로 나섰다.  그는 파라솔을 받은 후에 손수건을 코에 대어서 쏘는 듯한 콜타르 내음새를 막으면서 N통, K정 등을 지나서 혜숙의 집에 이르렀다. 그리 부자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경성 중류민의 열에는 드는 혜숙의 집은 굉대(宏大)하지는 못하지만 쑬쑬하고 정하기는 하였다. 그 집의 방의 배치를 익히 아는 엘리자베트는 들어서면서 파라솔을 접어서 마루 한편 끝에 놓은 후에,
+
배신감을 느낀 엘니자벳트는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재판을 청구하나 재판에서 패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만다.
  
"너무 갑갑해서 놀러 왔다 얘.
+
엘니자벳트는 이러한 시련이 자신의 약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강한 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하면서 혜숙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들어서면서, 혜숙이가 동모(同某) S와 무슨 이야기를 열심으로 하다가 자기 온 것을 알고 뚝 그치는 것을 알았다.
+
==전문==
  
‘S는 원, 무엇 하러 왔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791996&cid=51280&categoryId=51353 약한 자의 슬픔 전문]
  
그는 이유 없는 질투가 마음에서 끓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
==비평==
  
‘흥, 혜숙이는 S로 인하여 나한테 놀러도 안 오는구만. 너희끼리만 잘들 놀아라.’
+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에 나타난 단속적(斷續的) 주체와 법정 서사 = Intermittent Subject in 「The Sorrow of the Weak」 and Court Narrative, 이은선, 국제어문학회, 2017
  
혜숙이가 한 번도 자기게 놀러 와 본 때가 없으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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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발견과 권선징악의 소멸 - 「약한 자의 슬픔」을 중심으로 = The discovery of the inner surface and the extinction of the Encouraging Good &amp; Punishing Evil, 김경애, 명지대학교(서울캠퍼스) 인문과학연구소, 2014
  
"아, 엘리자베트 왔니. 우린 이제껏 네 이야기 하댔지. 그새 왜 안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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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애의 이상과 식민지 근대의 현실―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연구 = The Ideal of Free Love and Colonial Modernity in Korea, 김지영, 우리어문학회, 2003
  
혜숙이와 S는 동시에 일어나면서,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왼손, S는 바른손을 잡고 주좌(主座)에 끌어다 앉히었다. 엘리자베트는, 아직 십구 세의 소녀이지만 재주와 용자(容姿)로 모든 동창들에게 존경과 일종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재주로 인하여 아직 통학중이지만 K남작의 집에 유(留)하면서 오후에는 그 집 아이들에게 학과의 복습을 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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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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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약한_자의_슬픔.jpg|200px]]
  
"내 이야기라니 무슨? 내 숭들만 실컷 보고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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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촬영: )
  
엘리자베트는, 앉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억지로 성난 것을 감추고 농담 비슷하니 물었다. 혜숙과 S는 의논하였던 것같이 잠깐 서로 낯을 향하였다가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비죽하니 하고 머리를 돌이켰다.
+
==관련항목==
  
"내 이야기라니 무슨?"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네 이야기라니. 저―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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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혜숙이가 감춰 두자 엘리자베트는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차차 노기를 외면에 나타내게 되었다.
+
| [[약한 자의 슬픔]] || [[김동인]] || A는 B에 의해 집필되었다 ||
 
+
|-
"내 이야기라니 무엇이야 얘? 안 가르쳐 주면 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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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1919년]] || A는 B에 출판되었다 ||
"네 이야기라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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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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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단편소설]] || A는 B이다 ||
혜숙이는 아까와 같은 말을 한 후에 S와 또 한번 마주 향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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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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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김동인]] || A는 B의 처녀작이다 ||
"그럼 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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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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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창조]] || A는 B에 발표되었다 ||
하고 엘리자베트는 일어서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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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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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자연주의]] || A는 B를 보여준다 ||
"얘, 가르쳐 줄라. 참말은 네 이야기가 아니고 저-―-- 이환(利煥) 씨 이야기.“
+
|}
 
 
말이 끝난 뒤에 혜숙이는 또 한번 S와 낯을 향하였다. 혜숙의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노기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했다는 감을 함께 머금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 엘리자베트가 매일 통학할 때에 N통 꺾어진 길에서 H의숙(義塾) 제모를 쓴 어떤 청년과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닷새에 좀 정답게 생각되고, 열흘에 그를 만나지 못하면 섭섭하게 생각되고, 이십 일에 연애라 하는 것을 자각하고, 일 삭 만에 그 청년의 이름을 탐지하였다. ‘그도 나를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과 ‘웬걸, 내게는 주의도 안 하더라’ 하는 생각이 그 후부터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서 쟁투하고 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렇거니와 엘리자베트도 연애―--- 짝사랑〔片戀〕이던-―--를 안 후부터는 벗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뭏지도 않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염세의 생각과 희열의 생각이 함께 마음속에서 발하여 공연히 심장을 뛰놀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일도 없는데 이환이와 만나게 되는 길에 가보았다, 이와 같이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무게도 통사정할 사람이 없는 엘리자베트는 혜숙에게 이 말을 다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의 비밀을 혜숙이는 S에게 알게 하였다 할 때는 그는 성이 났다. 처녀가 학생에게 사랑을 한다 하는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웠다. 둘―---혜숙과 S―---이서 내 숭을 실컷 보았겠거니 할 때에 그는 모욕을 당했다 생각하였다. 혜숙과 S가 서로 낯을 보고 웃을 때에 이 생각이 더 심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밀을 혜숙에게 고백하였다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성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이껀 자기를 믿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이런 말을 광고같이 떠들춘단 말인가.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고? 아, 부모가 살아 계시면…….’
 
 
 
살아 있을 때는, 자기를 압박하는 것으로 유일의 오락을 삼던 부모를 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그도, 부모에게 대하여, 지금은 유일의 믿을 만한 사람이고 유일의 의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혜숙에게 대하여서는 무한한 증오의 염이 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환과 자기의 새-―--이것이 이제 화제가 되는 것을 그는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화제가 되기를 열심으로 바라고 있다. 좀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자기 말을 듣고 엘리자베트가 성을 낸 것을 빨리 알아챈 혜숙이는, 화제를 바꾸려고 학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너 기하 숙제 해보았니? 난 암만해두 모르겠두나."
 
‘아차!’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의 희망은 끊어졌다.
 
 
 
‘내가 성을 낸 것을 알고 혜숙이는 이렇게 돌려다 대누나.’
 
 
 
하면서도 성을 억지로 감추고 낯에 화기를 나타내고 대답하였다.
 
 
 
"기하? 해보지는 않았어도 해보면 되겠지."
 
"그럼 좀 가르쳐 주렴.“
 
 
 
기하책을 갖다 놓고 셋은 둘러앉아서 기하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한 이십 분 동안 기하를 푸는 새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혜숙과 S의 우교(友交)에 대한 시기도 없어지고, 혜숙에게 대한 증오도 없어지고, 동창생에 대한 애정과 동성에 대한 친밀한 생각만 나게 되었다. 복습을 필한 후에 셋은 잠깐 무언으로 있었다. 그 동안 혜숙은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도 다만 빙긋 웃기만 하고 말은 못 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빨리 하렴.’
 
 
 
엘리자베트는 또 갑자기 희망을 품고 심장을 뛰놀리면서 속으로 명령하였다.
 
엘리자베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혜숙이는 안심한 듯이 말을 시작한다.
 
 
 
"얘― 얘―“
 
 
 
이 말만 하고 좀 말하기가 별(別)한 듯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또 시작한다.
 
 
 
"이환 씨느으으은 S의 외사촌 오빠란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는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이환이와 직접 대면한 것같이 형용할 수 없는 별한 부끄러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좀더 똑똑히 알려고,
 
 
 
"거짓말!
 
 
 
하고 혜숙이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야. S한테 물어 보렴. 이 애 S야, 그렇지?“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S 편으로 돌려서 S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환이가 S의 외사촌이라는 것은 팔구분은 믿으면서도……. S는 다만 웃고 있었다.
 
 
 
‘모욕당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속으로 고함을 치고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S에게서 이환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도 너를 사랑한다더라’란 말까지 듣고 싶었다.
 
 
 
"응, 그렇지 얘?“
 
 
 
하는 혜숙의 소리에 S는 그렇단 대답만 하였다. 그리고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았다.
 
 
 
‘S의 웃음. 의미 있는 듯한 웃음. 무슨 웃음일꼬? 거짓말? 이환 씨가 S의 오빠라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참말이다. 그러면 무슨 웃음일꼬? 이환 씨는 나 같은 것은 알아도 안 보나? 아! 무엇? 아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S에게 고백하였다. 아, 이환 씨는 날 사랑한다. 결혼! 행복!
 
 
 
그는 자기게 이익한 데로만 생각을 끌어가다가 대담하게 되어서 머리를 들면서, 결심한 구조(口調)로 말을 걸었다.
 
 
 
"얘, S야."
 
"엉?"
 
경멸하는 듯이 S는 대답하였다. 이 소리에, 엘리자베트의 용기가 대부분은 꺾어졌다.
 
"너…….“
 
 
 
그는 차마 그 뒤는 말을 발하지 못하여 우물우물하다가 예상도 안한 딴말을 묻고 말았다.
 
 
 
"기하 다 했니?"
 
"기하라니? 무슨?“
 
 
 
S는 대답 겸 물어 보았다.
 
 
 
"내일 숙제."
 
"이 애 미쳤나 부다.“
 
 
 
엘리자베트는 왜인지 가슴에서 똑 하는 소리를 들었다. S는 말을 연속하여 한다.
 
 
 
"이제 우리 하지 않았니?"
 
"응?…… 참…… 다 했지…….“
 
 
 
S는 ‘다 알았소이다’ 하는 듯이 교활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의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뺨과 목의 윤곽을 들여다보았다.
 
 
 
‘모욕을 당했다.’
 
 
 
엘리자베트는 또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아까 집에서 혜숙의 집에 가야겠다 생각할 때에, 참지 못하게 가고 싶던 그와 동 정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고 싶은 고로,
 
 
 
"난 간다.“
 
 
 
소리만 지르고, 동무들이 ‘왜 가니?’ ‘더 놀다 가렴’ 등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나섰다.
 
 
 
'''2'''
 
 
 
늦은 봄의 저녁빛은 따슷하였다. 도회의 저녁은 더 번잡하였다. 시멘트 인도는 무수히 통행하는 사람의 발로 인하여 처르럭처르럭 때가닥때가닥 하는 소리를 시끄럽도록 내면서도 평안히 누워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위를 짧게 비추었다, 사람이 다 통과한 후에는 도로 길게 비추었다 하는, 자기와 함께 나아가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아! 잘못하였군. 그 애들은 내가 나선 다음에 웃었겠지. 잘못하였어? 그럼 어찌하여야 하노? S를 얼려야지. 얼려? 응. 얼린 후엔 들어야지. 무엇을. 무엇을? 그것을 말이지. 그것이라니? 아― 그것이라니? 모르겠다. 사탄아 물러가거라. S가 이환 씨의 누이이고. S가 혜숙의 동무이고. 또 내 동무이고. 이환 씨는 동무의 오빠이고. 사람이 다니고. 전차. 아이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왜 웃는단 말인가? 왜? 우스우니깐 웃지. 무엇이 우스워. 참 무엇이 우스울까?’
 
 
 
그는 또 한번 웃었다. 그렇지만, 이 웃음은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스워서 웃는 것이다. 그가 왜 우스운지 그 이유를 해석하려고, 혼돈된 머리로 생각하면서, 발은 본능적으로 차차 집으로 가까이 옮겨 놓았다. 꾸부러진 길을 돌아설 때에, 그는 아직껏 보고 오던 자기 그림자를 잃어버린 고로 잠깐 멈칫 섰다가, 또 한번 해석지 못한 웃음을 웃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들어설 때는, 다섯시 반 좀 지난 후 K남작은 방금 저녁을 먹고 처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을 때이다. 조선의 선각자로 자임하는 남작은, 내외의 절(節)과 안방 사랑의 별은 폐하였지만 남존여비의 생각은 아직껏 확실히 지켜 왔다. 엘리자베트는, 먹기 싫은 밥을 두어 술 먹은 후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아직 어둡지도 않았는데 전등을 켜고 책궤상 머리에 가 앉았다. 아무 작용도 아니 하는 눈을 공연히 멀거니 뜨고, 책상을 오르간으로 삼고 다뉴브 곡을 뜯으면서, 그는 머리를 동작시키고 있었다. 웃음. S. 이환. 결혼. 신혼여행. 노후의 안락. 또는 거기는 조금도 상관없는 다른 공상이 속속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끝없이 나는 공상을 두 시간 동안이나 한 후에, 이제껏, 희미하니 아물아물 기어가는 것같이 보이던 벽의 흑점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는 자리를 펴고 자고 싶은 생각이 났다. 아까 저녁 먹을 때에 남작의,
 
 
 
"오늘 밤에는 회(會)가 있는 고로 밤 두시쯤 돌아오겠다.“
 
 
 
는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별로 안심이 되어 자리를 펴고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몇 가지 공상이 또 머리에서 왕래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가, 열한시쯤, 자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는 고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전등 아래, 의관을 한 남작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잠이 수천 리 밖에 퇴산(退散)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남작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으로, 남작의 요구를 깨달았다. 하고 겨우 중얼거렸다.
 
 
 
"부인이 아시면?"
 
‘아차!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부인이 모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모르면?…… 이것이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면 너는 그것을 싫어하느냐? 물론 싫어하지. 무엇? 싫어해? 내 마음속에, 허락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냐 아…… 허락하면 어쩠냐? 그래도…….’
 
 
 
일순간에 그의 머리에 이와 같은 생각이 전광과 같이 지나갔다.
 
 
 
"조용히! 아까, 두시에야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니깐 모르겠지요.“
 
 
 
남작은 말했다. 이제야 엘리자베트는 아까 남작이 광고하듯이 지껄이던 소리를 해석하였다. 그러고, 두 번째 거절을 하여 보았다.
 
 
 
"부인이 계시면서두……?"
 
‘아차!’
 
 
 
그는 또 속으로 고함을 안 칠 수가 없었다.
 
 
 
‘부인이 없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것은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남작은 대답 없이 엘리자베트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리 보세요?“
 
 
 
그는 남작의 시선을 피하면서, 별한 웃음―---애걸하는 웃음―---거러지의 웃음을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아차!
 
 
 
그는 세 번째 고함을 속으로 발하였다.
 
 
 
‘이것은 매춘부의 웃음, 매춘부의 행동이 아닐까……?’
 
 
 
몇 번 거절에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정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뉘게 대하여선지는 모르면서도 모르는 어떤 자에게 골이 나서, 몸을 꼬면서 좀 날카롭게, 그래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싫어요.“
 
 
 
남작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았다. 남작이 불을 끈 것이다. 그 후에는 남작의 의복 벗는 소리만 바삭바삭 났다. 엘리자베트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하여진 엘리자베트는, 한참 있다가 거기서 직수면상태로 들어서 푹 잠이 들었다가, 다섯시쯤, 동편 하늘이 좀 자홍색을 띠어 올 때에 무엇에 놀란 것같이 움쭉 하면서 눈을 떴다. 회색 새벽빛을 꿰어서, 먼트고메리회사제 벽지가 눈에 드는 동시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이 생각났다. 곁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고로 남작이 돌아갔을 줄은 확신하면서도, 만일 있었다는 하는 의심이 나는 고로, 그는 가만가만 머리를 그편으로 돌렸다. 거기는 남작이 베느라고 갖다 놓았던 책이 서너 권 두겨 있었다.
 
 
 
‘그럼 저편 쪽에 있지. 저편 쪽 벽에 꼭 붙어 서서, 날 놀래려고 준비하고 있지.’
 
 
 
엘리자베트는 흥미 절반, 진정 절반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갑자기 남작이 숨기 전에 발견하려고 머리를 돌이켰다. 거기는 차차 흰빛으로 변하여 오는 새벽빛에 비친 벽지의 모양만 보였다.
 
 
 
‘어느 틈에 또 다른 편으로 뛰었군!
 
 
 
하면서 그는 남작을 잡느라고 이편 저편으로 머리를 휙휙 돌리다가,
 
 
 
‘일어나야 순순히 나올 터인가 원.’
 
 
 
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속곳, 바지로서 버선까지 신는 동안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어지고 엊저녁 기억이 차차 부활키 시작하였다.
 
 
 
‘내 속이 왜 그리 약하단 말인고? 정신이 아득하여질 이유가 어디 있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으면 정신이나…… 아― 지금 남작은 무엇 하고 있노.’
 
 
 
그는 자기가 남작에 대하여서도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차라리 놀랐다. 마음속에서는 또 적막의 덩어리가 뭉쳐 나왔다. 그는 무한 울고 싶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다섯시 십삼분이다.
 
 
 
‘울 시간이 넉넉하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참지 못하고 꼬꾸라져서 흘쿡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작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내 전정(前程)은 어떠할까…….’
 
 
 
울음이 끝나기까지 한참 운 그는, 눈물이 자연히 멎은 후에 머리를 들었다. 아침 햇빛은 눈이 시도록 방 안을 들이쪼이고 있었다. 밝은 햇빛을 본 연고인지 실컷 운 연고인지, 엘리자베트는, 오랫동안 벼르던 원수를 갚은 것같이 별로 속이 시원한 고로, 일어서서 세수를 하러 갔다.
 
세수를 한 후에 그는, 거기서 잠깐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으러 가나. 안 가나. 밥은 먹어야겠고. 거기는 남작이 있겠고……. 그러다가 그는, 필사적 용기를 내고 밥을 먹으러 갔다. 거기는 남작은 없었지만 그는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는 대로 낯을 안 보이게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런 후 자기 방에 와서 이부자리를 간지피고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로 향하였다. 정문 밖에 나선 그는, 또 한번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이 길로 가면 이환이를 만나겠고. 저 길로 가면 대단히 멀고. 그의 마음속에는 쟁투가 일어났다. 자기에게 대하여 애정을 나타내지도 않는 이환의 앞을, 복수 겸으로 유유히 지나갈 때의 자기의 상쾌를 그는 상상하여 보았다. 이환이는 그 일을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엘리자베트에게는 한 쾌락-―--만약 엘리자베트에게 복수할 마음이 있다 하면―--- 에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환이를 사랑하였다. 문자 그대로 ‘자기 몸과 동 정도로 그를 사랑’하였다. 이러한 엘리자베트는 그런 참혹한 일을 행할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어느덧 먼 길―--- 안 만나게 되는 길―--- 편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학교에서도 엘리자베트는 성가신 일일을 보내고 하교 후 곧 집으로 돌아왔다.
 
 
 
'''3'''
 
 
 
단조하고도 복잡한 엘리자베트의 생활은 여전히 연속하여 순환되고 있었다. 아침 깨어서는 학교에 가고. 하학 후에는 아이들과 마주 놀고. 자고-―--다만 전보다 변한 것은 평균 일 주 이 회의 남작의 방문을 받는 것이라. 대개는, 엘리자베트가 예기한 날 남작이 왔다. 남작이 오리라 생각한 날은, 엘리자베트는 열심으로 남작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 방은 남작 부인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고로 남작이 와도 그리 말은 사 괴지 못하였다. 엘리자베트는 그것으로 남작이 와 있을 동안은 너무 갑갑하여 빨리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치만 일단 남작이 돌아가고 보면 엘리자베트는, 남작이 좀더 있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만약 엘리자베트가 예기한 날 남작이 오지를 않으면 그는 어찌할 줄 모르게 속이 타고 질투를 하였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엘리자베트에게 있었다. 때때로 이환의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때는,
 
 
 
‘자기도 나를 생각지 않는데, 내가 그러면 뭘 한가.’
 
‘내가 자기와 약혼을 했댔나.’
 
 
 
등으로 자기를 위로하여 보았지만, 대개는 ‘변해(辯解)’를 ‘미안(未安)’이 쳐 이겼다. 그럴 때는 문자 그대로 ‘심장을 잘 들지 않는 칼로 베어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그는 꼬꾸라져서 장시간의 울음으로 겨우 자기를 위로하곳 하였다. 그는 부인에게 대하여서도 미안을 감(感)하였다.
 
 
 
"남편을 가로앗았는데 왜 미안치를 않을까.“
 
 
 
그는 때때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새에도, 학교에는 열심으로 상학(上學)하였다. 학교에도 무한한 혐오의 정과 수치의 염이 나지마는, 집에 있으면 더 큰 고통을 받는 그는 일종의 위안을 얻느라고 상학하였다. 그동안 시절은 바뀌었다. 낮잠 잘 오고 맥이 나는 봄시절은, 비 많이 오는 첫여름으로 변하였다.
 
 
 
'''4'''
 
 
 
엘리자베트와 남작의 첫 관계가 있은 후, 다섯 번 일요일이 찾아왔다. 오후 소아주일학교(小兒主日學校) 교사인 엘리자베트는 소아 교수와 예배를 필한 후에 아이들 틈을 꿰면서 예배당을 나섰다. 벌겋고 누런 장마때 저녁해는 절벅절벅하는 길을 내리쪼이고 있었다. 북편 하늘에는 비를 준비하는 검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예배당 정문을 나설 때에,
 
 
 
"너 이즈음 학교에 왜 다른 길로 다니니?“
 
 
 
하는 혜숙의 소리가 그의 뒤에서 났다. 엘리자베트는 돌아보지도 않고 속으로 다만,
 
 
 
‘다른 길로 학교엘 다녀? 다른 길로 학교엘 다녀?’
 
 
 
하면서 집으로 향하였다. 남작 집 정문을 들어서려 하다가 그는 우뚝 섰다. 혜숙의 말이 이제야 겨우 해석되었다.
 
 
 
‘응 다른 길로 학교엘 다닌다니 내가 다른 길로 학교에를 다닌다는 뜻이로군.’
 
 
 
그는 별한 웃음을 웃고 자기 방으로 향하였다. 자기 방에 들어서서 책보를 내어던지고 앉으려 하다가 그는 또 한번 꼿꼿이 섰다. 사지가 꼿꼿하여지는 것을 깨달았다. 십여 초 동안 이와 같이 꼿꼿이 섰던 그는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그의 가슴에서는 무슨 덩어리가 뭉쳐서 나오다가, 목에서 잠깐 회전하다가 그 덩어리가 코와 입으로 폭발하곳 한다. 그럴 때마다 눈에서는 눈물이 푹푹 쏟아지고 가슴은 싹싹 베어내는 것같이 아팠다. 그에게는, 두 달 동안 몸이 안 난 것이 생각이 났다. 잉태! 엘리자베트에게 대하여서는 이것이 ‘죽으라’는 명령보다도 혹독한 것이다. 그는 잉태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미래-―-- 희미하고 껌껌한 그의 ‘생’ 가운데, 다만 한 줄기의 반짝반짝하게 보이는 가는 (細한) 광선―---이러한 미래를 향하고 미끄러져서 나아가던 그는 잉태로 인하여 그 미래를 잃어버렸다. 기(其) 미래는 없어졌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은 이것을 깨달은 때에 나오는 진정의 울음이다. 심장 복판 가운데서 나오는 참눈물이다. 이렇게 한참 운 그는 눈물 주머니가 다 마른 후에 겨우 머리를 들고 전등을 켰다. 눈이 붉어지고 눈두덩이 부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보통보다 곱 이상이나 크게 보였다.
 
 
 
‘첫 배는 그리 부르지 않는다는데. 게다가 달 반밖에는 안 되었는데.’
 
 
 
하고 그는 다시 보았다. 조금도 부르지를 않았다.
 
 
 
‘그래도 안 부를 수가 있나?’하고 그는 또다시 보았다. 보통보다 삼 곱이나 크게 보였다. 쾅쾅 하는 아이의 발소리가 이럴 때에 엘리자베트의 방으로 가까이 온다. 엘리자베트는 빨리 어두운 편으로 향하였다. 문이 열리며 여덟 살 된 남작의 아들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에게 저녁을 재촉하였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가 싫은 엘리자베트는 안 먹겠다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가 돌아간 뒤에 엘리자베트는 중얼거렸다.
 
 
 
‘꼭 좋은 때 울음을 멈추었군. 좀더 울었더면 망신할 뻔했다.’
 
 
 
조금 후에 부인은 친절하게 죽을 쑤어다가 그에게 주었다. 죽을 먹고 죽그릇을 돌려보낸 후에, 아까 울음으로 얼마 속이 시원하여지 고 원기까지 좀 회복한 엘리자베트는 남작과 이환 두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음속에 두 사람을 그린 후에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사랑스러운고 생각하여 보았다. 사랑스럽기는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지만, 가깝기는 아무래도 남작이 더 가까운 것같이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결단은 그의 구하는 바를 채우지를 못하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편이 더 가깝고 가까운 편이 더 사랑스럽기를 원하였다. 그렇지만 사랑과 가까움은 평행으로 나가서 아무 데까지 가도 합하지를 않았다. 그는 평행으로 나가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어디까지나 나가는가를 알려고, 마음속에 둘을 그려 놓고 그 둘을 차차 연장시키면서, 눈알을 구을려서 그것들을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둘은 종시 합하지 않았다. 끝까지 평행으로 나갔다.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은, 끝까지 분립(分立)하여 있었다. 여기 실패한 엘리자베트는 다시 다른 생각으로 그것을 보충하리라 생각하였다.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게 더 정다울까 가까운 편이 더 정다울까,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어떻든, 둘 가운데 하나는 정다워야만 된다고, 그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트는 여기서도 만족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아까 생각과 이번 생각이 혼돈되어 나온 결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편이, 물론 자기게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다운 편은 어느 편인고?’
 
 
 
그는 생각하여 보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완전한 해결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속이 답답하여졌다. 자기에게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온전히 분립하여 있는 것을 안 엘리자베트는, 어느 편이 자기게 더 정다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둘이 동 정도로 정답다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 자기가 생각하여 보아도 있지 못할 일이다. 남작과 이환 새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다. 두 번째 생각도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이나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이번은 직접 당인(當人)으로 어느 편이 자기게 더 정답게 생각되는가 자문하여 보았다. 이환이가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도 마음에 얼마의 가책이 있고, 그러니 남작이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는 더 큰 아픔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는 억지로 생각의 끝을 또 다른 데로 옮겼다. 엘리자베트는 맨 처음 생각을 다시 하여 보았다. 이번도, 사랑스러움은 이환의 편으로 갔다.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게 더 가까우니까, 이환이가 자기게 물론 더 가깝다. 따라서, 정다움도 이환의 편으로 간다.’
 
 
 
그는 억지로 이렇게 해결하였다. 이렇게 해결은 하였지만, 또 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면, 가깝던 남작은 어찌 되는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맨 첫번과 같이 역시 남작은 자기게는 더 친밀하게 생각되었다. 그럼 이환이는……? 이환에게 대한 미안이 마음속에 떠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속이 타서 팔을 꼬면서 허리를 젖혔다. 그때에 벽에 걸린 캘린더가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캘린더는 다른 사건을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생각나게 하였다. 이 절박한 새 사건은 이환의 생각을 머리에서 내어쫓기에 넉넉하였다. 오늘 밤에는 남작이 오리라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엘리자베트에게 잉태를 생각나게 하였다. 남작이 오면 모든 일―---잉태와 거기 대한 처치-―--을 다 말하리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작에게 할 말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말은 짧지마는, 이 말을 남작에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부끄러움에 다름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고 남작이 알아들어야 된다는 조건 아래서 할 말을 복안하여 보았다. 한 번 지어서 검열한 후 교정을 가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네 번 하여 보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이렇게 한참 생각할 때에 문이 열리며 남작이 들어왔다. 엘리자베트의 복안은 남작을 보는 동시에 쪽쪽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다만, 남작에게 매어달려 통쾌히 울고, 남작이 아프도록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 남작의 ‘아이고’ 소리 ‘이 야단났구먼’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는 이 생각을 억제하느라고 손으로 ‘해변의 곡’을 뜯기 시작하였다. 둘은 전과 같이 서로 마주 흘겨만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에게는 싸움이 일어났다.
 
 
 
‘말할까말까. 할까. 말까. 어찌할꼬.’
 
 
 
이러다가 갑자기 무의식히,
 
 
 
"선생님.“
 
 
 
하고 남작을 찾은 후에 자연히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남작은 찾았는데 그 뒷말을 어찌할꼬. 이것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난 제일 큰 문제이다. ‘해변의 곡’을 뜯던 손도 어느 틈에 멎었 다.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똑똑히 의식지 못하리만큼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낯도 훌꾼훌꾼 단다.
 
 
 
"네?“
 
 
 
남작은 대답하였다. 남작이 대답한 것을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원망하였다. 남작이 엘리자베트 자기가 부른 소리를 못 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엘리자베트가 품는 동시에 남작은 엘리자베트의 부름에 대답을 한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나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가 부르고 남작이 대답을 하였으니 설명을 하여야겠고 그러니 그 말을 어찌 하노?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이 울음에서 얼마의 효과가 나타나리라.’
 
 
 
엘리자베트는 울면서 생각하였다.
 
 
 
"왜 그러오.“
 
 
 
남작은 놀란 소리로 물었다.
 
 
 
"아―아 어찌할까요?"
 
"무엇을?“
 
 
 
엘리자베트는 대답 대신으로 연속하여 울었다. 한참이나 혼자 울다가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까 대답을 못 한 자기를 책망하였다. 남작이 ‘왜 그러는가’ 물을 때가 대답하기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그 기회를 비게 지나 보낸 엘리자베트는 자기를 민하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그런 기회를 기다려 보았지만, 남작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좀더 심히 울면 남작이 무슨 말을 하겠지’ 생각하고, 엘리자베트는 좀더 빨리 어깨를 젓기 시작하였다.
 
 
 
"아 왜 그러오.“
 
 
 
남작은 이것을 보고 물었다.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또 못 하였다. ‘무엇이라고 대답할꼬’ 생각하는 동안에 기회는 지나갔다. 이제는 대답을 못 하겠고 아까는 대답을 못 하였으니 다시 기회를 기다려 보자 엘리자베트는 생각하고, 기회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이번 물을 때에는 무엇이라 대답할까?’
 
 
 
엘리자베트는 울면서 생각하여 보았다. 이때에 남작의 세 번째 물음이 이르렀다.
 
 
 
"아 왜 그런단 말이오?"
 
"잉태.“
 
 
 
대답을 한 후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의 용기에도 크게 놀랐다. 이 말이 이렇게 쉽게 평탄하게 나올 것이면, 아까는 왜 안 나왔는고 하는 생각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지나갔다.
 
 
 
"잉태!?“
 
 
 
남작은 놀란 목소리로 엘리자베트의 말을 다시 하였다. 제일 어려운 말-―--잉태란 말을 하여 넘기고, 남작의 놀란 소리까지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용기가 몇 배가 많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뒷말은 술술 잘 나왔다.
 
 
 
"병원에-―-- 가서―--- 떨어쳤으면…… 어…….“
 
 
 
남작은 대답이 없었다. 남작이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본 엘리자베트는 마음속에 갑자기 한 무서움이 떠올라왔다. 난 모른다 하고 돌아서지나 않을 터인가? 이것이 엘리자베트에게는 제일 무서움에 다름없었다. 훌쩍훌쩍 소리가 더 빨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남작은 성가신 듯이 물었다.
 
 
 
"원 어찌하란 말이요? 그리 울면."
 
"어떻게든…… 처치…….“
 
 
 
엘리자베트는 겨우 중얼거렸다. 남작의 성낸 말을 들은 때는 엘리자베트의 용기는 다 도망하고 말았다.
 
 
 
"처치라니, 어떤?"
 
"글쎄…… 병원……."
 
"벼엉원?…… 응!…… 양반이 그런…….“
 
 
 
엘리자베트는 ‘그러리라’ 생각하였다.  ‘그래도 남작이라고 존경까지 받는 사람이 낙태 일로 병원이라니.’그는 갑자기 설움이 더 나왔다. 가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남작은 좀 불쌍하게 생각났던지 정답게 말하였다.
 
 
 
"우니 할 수 있소? 자 어떻게 하잔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일변 기쁘고도 일변은 더 섧고 억지도 쓰고 싶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몰라요. 전 아무래도 상것이니깐."
 
"그러지 말구. 어쩌잔 말이오?"
 
"몰라요 몰라요. 저 같은 것은 사람이 아니니깐."
 
"조용히! 저 방에서 듣겠소."
 
"들어두 몰라요.“
 
 
 
엘리자베트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에―익!“
 
 
 
하고 남작은 벌떡 일어섰다. 엘리자베트도 우덕덕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들었다. 그는 정신이 없어졌다. 자기 뇌를 누가 빼어 간 것같이 마음속이 텡텡 비게 되면서 퉁퉁거리며 걸어나가는 남작의 뒷모양을 눈이 멀거니 보고 있었다. 남작이 나가고 문을 닫는 소리가 엘리자베트의 귀에 들어올 때에, 그의 머리에는, 한 생각이 번갯불과 같이 번쩍 지나갔다. 한참이나 멀거니 그 생각을 하고 있다가 또 엎디며 울기 시작하였다. 아까 실컷 운 그는 이번에는 눈물은 안 나왔지만, 가슴에서, 배에서, 머리에서 나오는 이 참울음은 눈물을 대신키에 넉넉하였다. 그가 아까 혜숙의 말의 의미와 나온 곳을 이제야 겨우 온전히 깨달았다.
 
 
 
‘내가 다른 길로 다니는 것을 혜숙이가 어찌 알까? 어찌 알까? 혜숙이는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이환! 그가 알고 이것을 S에게 말하였다. S는 이것을 혜숙에게 말하였다. 혜숙은 이것을 내게 물었다. 그렇다! 이렇게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다. 무론 그렇지! 그러면 그도 내게 주의를 한 거지? 이 말을 S에게까지 한 것을 보면 그도-―-- 내게…… 그도-―-- 내게…… 그도…… 남작. 남작은 내 말을 듣고 도망하였지. 아니 도망시켰지. 아니 도망했지. 남작은…… 남작의…… 이환 씨. 전에 본 S의 웃음. 응. 그 전날 그는 S에게 고백하였다. 그것을 고것이, 고것들이. 고, 고, 고것들이…… 어찌 되나. 모두 어찌 되나. 나와 남작, 나와 이환 씨. 이환 씨와 S. S와 남작. S. 혜숙이. 남작과 이환 씨. 모두 어찌 되나?’
 
 
 
그의 차차 혼돈되어 가는 머리에도 한 가지 생각은 꼭 들어붙어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이환이를 사랑하였다. 이환이도 그를 사랑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이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을 고백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각각 자기 사랑은 짝사랑〔片戀〕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을 짝사랑이라 생각한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쉽게 몸을 남작에게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거반 성립되어 가던 그의 사랑―---신성한 동애(童愛)―---귀한 첫사랑은 파괴되었다. 육(肉)으로 인하여 사랑은 파멸되었다. 사랑치 않던 사람으로 인하여 참애인을 잃었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모, 모, 몸으로 인하여…… 참사랑……을…… 아― 이환 씨…… S와 혜숙이. 고것들도 심하지. 우우 왜 당자에겐…… 그 이…… 그―그 이야기를 안 해…… 남작이. 아― 잉태.’
 
 
 
일단 멎어 가던 그의 울음이 이 생각이 머리에 지나갈 때에 또다시 폭발하였다. 눈물도 조금씩 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한참 운 그는, 두 번째 울음이 멎어 갈 때에 맥이 나면서 그 자리에 엎딘 채로 잠이 들었다.
 
 
 
'''5'''
 
 
 
하루 종일 벼르기만 하고 올 듯 올 듯하면서도 오지 않던 비가 이튿날 새벽부터는 종시 내리붓기 시작하였다. 서울 특유의, 독으로 내리붓는 것 같은 비는, 이삼 정(丁) 앞이 잘 보이지 않도록 좔좔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서울 장안은 비로 덮였다. 비로 싸였다. 비로 찼다. 그 비 가운데서도 R학당에서는 모든 과목을 다 한 후에 오후 두시에 하학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를 나섰다. 그가 혜숙의 곁을 지나갈 때에 혜숙이가 찾았다.
 
 
 
"얘 엘리자베트야!"
 
"응?“
 
 
 
대답하고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혜숙이는 모든 일을 다 알리라.’
 
 
 
그는 이와 같은 허황한 생각을 하였다.
 
 
 
"너 이즈음 왜 우리집에 안 오니?"
 
"분주하여서…….“
 
 
 
엘리자베트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안심을 하였다.
 
 
 
‘혜숙이는 모른다.’
 
"무엇이 분주해?“
 
 
 
혜숙이가 물었다.
 
 
 
"그저 이 일두 분주하구 저 일두 분주하구…… 분주 천지루다.“
 
 
 
엘리자베트는 이와 같은 거짓 대답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한 바람〔希望〕이 있었다. 그는 달반이나 못 간 혜숙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혜숙이가 억지로 오라면 마지못하여 가는 체하고 끄을려 가고 싶었다.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를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혜숙의 주의를 끄을려고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너무 분주해서……."
 
"분주할 일은 없겠구만…….“
 
 
 
혜숙이는 이 말만 하고 자기 갈 길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혜숙의 행동을 원망하면서 마지못하여 집으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의 자존심은 꺾어졌다. 혜숙이가 엘리자베트 자기를 꼭 혜숙의 집에 끌고 가야만 바른 일이라 생각한 엘리자베트의 미릿생각〔豫想〕은 헛데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혜숙을 원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내가 혜숙이를 위해서 났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자기를 위로하여 보았지만, 부끄러운 일이든 무엇이든 원망은 원망대로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혜숙이로 인하여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것을…….’
 
 
 
할 때에 엘리자베트의 원망은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그는 혜숙의 집에 못 간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는 가운데도 가고 싶은 생각이 온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가고 싶은 생각’과 ‘갔다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다투기 시작하였다. 본능적으로 길을 골라 짚으면서, 비가 오는 편으로 우산을 대고 마음속의 싸움을 유지하여 가지고 집에까지 왔다. 그는 우산을 놓고 비를 떤 다음에 자기 방에 들어왔다. 멀끔히 치워 놓은 자기 방은 역시 전과 같이 엘리자베트에게 큰 적막을 주었다. 방이 이렇게 멀끔할 때마다 짐짓 여기저기 널어 놓던 엘리자베트도 오늘은 혜숙의 집에 갈까말까 하는 번민으로 인하여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책상머리에 가 앉았다. 책상 위에는 어떤 낯선 종이가 한 장 엘리자베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빨리 종이를 들었다. 가슴이 뛰놀기 시작한다…….
 
 
 
‘원 무엇인고……?’
 
 
 
그는 종이를 들고 한참 주저하다가 눈을 종이편으로 빨리 떨어쳤다.
 
 
 
‘오후 세시 S병원으로.’
 
 
 
남작의 글씨로다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남작에 대한 애경(愛敬)의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이 글 한 줄은 엘리자베트로서 남작에 대한 원망과 혜숙의 집에 갈까말까의 번민을 다 지워 버리기에 넉넉하였다.
 
 
 
‘역시 도망시킨 것이로군.’
 
 
 
그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남작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청하기는 하였지만 갑자기 남작 편에서 꺾어져서 오라 할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못 가겠다 생각하였다. 이 ‘부정’은 엘리자베트로서 무의식히 일어서서 병원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는 ‘못 가겠다 못 가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문 밖에 나서서 내리붓는 비를 겨우 우산으로 막으면서 아랫동이 모두 흙투성이가 되어서 전차 멎는 곳(停留場)까지 갔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꿈과 같이 걸었다. 엘리자베트는 멎는 곳에서 잠깐 기다려서, 오는 전차를 곧 잡아탔다. 비가 너무 와서 밖에 나가는 사람이 적었던지 전차 안은 비교적 승객이 없었다. 이 승객들은 엘리자베트가 올라탈 때에 일제히 머리를 새 나그네 편으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기 편으로 향한 모든 눈에서, 노파에게서는 미움, 젊은 여자에게서는 시기, 남자에게서는 애모를 보았다. 이 모든 눈은 엘리자베트에게 한 쾌감을 주었다. 그는 노파의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였다. 젋은 여자의 시기의 눈은 엘리자베트에게 이김의 상쾌를 주었다. 남자들의 애모의 눈이 자기를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약한 전류가 염통을 지나가는 것같이 묘한 맛이 나는 것이 어째 하늘로라도 뛰어올라가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배가 생각난 고로 할 수 있는 대로 배를 작게 보이려고 움츠러뜨렸다. 차장이가 와서 엘리자베트에게 돈을 받은 후에 뚱 소리를 내고 도로 갔다. 남자들의 시선은 가끔 엘리자베트에게로 날아온다. 그들은 몰래 보느라고 곁눈질하는 것도 엘리자베트는 다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엘리자베트는 자기도 그편을 보아 주고 싶었다. 치만 종시 실행은 못 하였다. 이럴 동안 전차는 S병원 앞에 멎었다. 엘리자베트는 섭섭한 생각을 품고 전차를 내렸다. 어떤 시선이 자기를 따라온다 그는 헤아렸다. 비는 보스럭비로 변하였다. 수레에서 내린 그는 마음의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병원에는 차마 못 들어갈 것같이 생각되었다. 집 편으로 가는 전차는 없는가 하고 그는 전차 선로를 쭉 보았다. 그의 보이는 범위 안에는 전차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병원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는 방(待合室)으로 갔다. 고지기(受付)한테 가서 주소 성명 연세 들을 기입시킨 후에 방을 한번 둘러다볼 때에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한편 구석에 박혀 있는 남작이 보였다. 엘리자베트는 다른 곳에서 고향 사람이나 만난 것같이 별로 정다워 보이는 고로 곧 남작의 곁으로 갔다. 그렇지만 둘은 역시 말은 사괴지 아니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눈이 멀거니 벽에 붙어 있는 파리떼를 보고 있었다. 몇 사람의 순번이 지나간 뒤에 사환아이가 나와서,
 
 
 
"강 엘리자베트 씨요.“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일어섰다. 가슴이 뚝뚝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찌하노.’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무의식히 사환아이를 따라서 진찰실로 들어갔다. 남작도 그 뒤를 따랐다. 석탄산과 알코올 내음새에 낯을 찡그리고 엘리자베트는 교자에 걸어앉았다. 의사는 무슨 약병을 장난하면서 머리를 숙인 채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시오?“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못 하였다. 제일 어찌 대답할지를 몰랐고, 설혹 대답할 말을 알았대도 대답할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있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이 ‘대답’을 허락지 않을 터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
 
 
 
남작이 엘리자베트의 대신으로 대답하려다가 이 말만 하고 뚝 그쳤다. 의사는 대답을 요구치 않는 듯이 약병을 놓고 청진기를 들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부끄러움도 의식지를 못하리만큼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눈은 보지를 못하였다. 그의 귀는 듣지를 못하였다. 그의 설렁거리는 마음은 다만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는, 엘리자베트 자기도 똑똑히 의미를 알지 못할 구(句)만 번갈아 하고 있었다. 의사는 엘리자베트에게로 와서 저고리 자락을 열고 청진기를 거기 대었다. 의사의 손이 와 닿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무슨 벌레를 모르고 쥐었다가 갑자기 그것을 안 때와 같이 몸을 옴쭉하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트는 의사의 손에서 얼마의 온미(溫味)를 깨달았다. 이성의 손이 살에 와 닿는 것은, 엘리자베트와 같은 여성에게 대하여서는 한 쾌락에 다름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이 쾌미를 재미있게 누리고 있을 때에 의사는 진찰을 끝내고 의미 있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남작에게로 향하였다. 남작은 의사에게 눈짓을 하였다. 어렴풋하게나마 이 두 사람의 짓을 본 엘리자베트는 이제껏 연속하고 있던 ‘어찌할꼬’ 뒤로 무한 큰 부끄러움이 떠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는 희미하니 한 가지 일을 생각하였다.
 
  
‘내가 대합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뒷일은 남작이 다 맡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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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어서서 기다리는 방으로 나왔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은 일제히 엘리자베트의 편으로 향하였다. 모두 내 일을 아누나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아까 전차에서 자기게로 향한 눈 가운데서 얻은 그 쾌미는, 구하려도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눈 가운데서 큰 고통과 부끄러움만 받은 그는 한편 구석에 구겨앉아서 치마 앞자락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거기는 불에 타진 조그마한 구멍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구멍이 공연히 미워서 손으로 빡빡 비비다가 갑자기 별한 생각이 나는 고로 그것을 뚝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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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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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80308&cid=46645&categoryId=4664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세상이 모두 나를 학대할 때에는 나는 이 구멍 안에 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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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791996&cid=51280&categoryId=51353 네이버 공유마당]
  
그는 생각하였다. 이럴 때에 그 구멍 안에는 어떤 그림자〔幻影〕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첫번에는 흐릿하던 것이, 차차 똑똑히까지 보이게 되었다. 때는 사 년 전 ‘춘삼월 호시절’, 곳은 우이동. 피고 우거지고 퍼진 꽃 사이를 벗들과 손목을 마주잡고 웃으며 즐기며 또는 작은 소리로 곡조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 다니던 자기 추억이 그림자로 변하여 그 구멍 속에 나타났다. 자기 일행이 그 구멍 범위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는 활동사진과 같이 번쩍 한 후 일행은 도로 중앙에 와 서곳 한다.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의 엘리자베트와 지금의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해와 흙의 다름이 있다. 그때에는 순전한 처녀이고 열렬한 분홍빛 탄미자(歎美者)이던 그가 지금은……? 싫든지 좋든지 죽음의 갈흑색의 ‘삶’ 안에서 생활치 않을 수 없는 그로 변하였다. ‘때’도 달라졌다. 십 년 동안 평화로 지낸 지구는, 오스트리아 황자(皇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동원을 한다, 도이치가 싸움을 하련다, 잉글리시가 어떻다, 프랑스가 어떻다, 매일 이런 이야기가 신문에 가뜩가뜩 차게 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주위도 달라졌다. 그의 모든 벗은 다 쪽쪽이 헤어졌다. R은 동경서 미술공부를 한다. 또 다른 R은 하와이로 시집을 갔다. T는 여의가 되었다. 그 밖에 아직 공부하는 사람도 몇이 있기는 하지만은 대개는 주부와 교사가 되었다. 주부 된 벗 가운데는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 된 사람까지 있다. 그들 가운데 한둘밖에는, 지금은 엘리자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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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작품]] [[분류:단편소설]] [[분류:근대]] [[분류:1919년]] [[분류:현대문학]] [[분류:정민정]]

2019년 6월 15일 (토) 12:15 기준 최신판



작품소개

김동인의 처녀작이다. 1919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창조 創造≫ 1·2호에 발표되었다.

작가의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문학적 성향을 알려주는 초기의 작품이다.

문학에서 도덕적 가치를 말하기보다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효용성 있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주요하게 본 작가의 자연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의 현실은 사회적으로나 신분상으로나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냉엄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창작 태도가 엿보인다.

줄거리

여학교에 다니는 강엘니자벳트는 K 남작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그에게 정조를 빼앗긴다.

그 후 그녀는 K 남작에게 애정을 느끼고 둘은 육체적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엘니자벳트가 임신을 하자 K 남작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낸다.

배신감을 느낀 엘니자벳트는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재판을 청구하나 재판에서 패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만다.

엘니자벳트는 이러한 시련이 자신의 약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강한 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전문

약한 자의 슬픔 전문

비평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에 나타난 단속적(斷續的) 주체와 법정 서사 = Intermittent Subject in 「The Sorrow of the Weak」 and Court Narrative, 이은선, 국제어문학회, 2017

내면의 발견과 권선징악의 소멸 - 「약한 자의 슬픔」을 중심으로 = The discovery of the inner surface and the extinction of the Encouraging Good & Punishing Evil, 김경애, 명지대학교(서울캠퍼스) 인문과학연구소, 2014

자유연애의 이상과 식민지 근대의 현실―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연구 = The Ideal of Free Love and Colonial Modernity in Korea, 김지영, 우리어문학회, 2003

관련이미지

약한 자의 슬픔.jpg

출처: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촬영: )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약한 자의 슬픔 김동인 A는 B에 의해 집필되었다
약한 자의 슬픔 1919년 A는 B에 출판되었다
약한 자의 슬픔 단편소설 A는 B이다
약한 자의 슬픔 김동인 A는 B의 처녀작이다
약한 자의 슬픔 창조 A는 B에 발표되었다
약한 자의 슬픔 자연주의 A는 B를 보여준다

약한.JPG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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