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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1890년 04월 26일~1957년 10월 10일)'''은 1890년 서울 출생 대한민국의 문학가이다.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이며 아호는 육당(六堂)이다. 신문관의 설립·운영과 잡지 발간을 통해 대중의 계몽 교도를 꾀했으며 창가·[[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를 열었다. 또한 그 시대의 한문투 중심의 문장들을 구어체로 변환하여 우리말 위주의 글을 쓰도록 선전하고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한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와 규제를 받다가 후에 친일의 길을 걷는다.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활동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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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1890년 04월 26일~1957년 10월 10일)'''은 1890년 서울 출생 대한민국의 문학가이다.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이며 아호는 육당(六堂)이다. 신문관의 설립·운영과 잡지 발간을 통해 대중의 계몽 교도를 꾀했으며 창가·[[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를 열었다. 또한 그 시대의 한문투 중심의 문장들을 구어체로 변환하여 우리말 위주의 글을 쓰도록 선전하고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한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와 규제를 받다가 후에 친일의 길을 걷는다.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활동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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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임.
 
*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임.
 
*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함.
 
*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함.
*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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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함
 
* '''1922년''' 동명사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발행,「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
 
* '''1922년''' 동명사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발행,「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
 
*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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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1일 (화) 23:19 판


개요

최남선(崔南善, 1890년 04월 26일~1957년 10월 10일)은 1890년 서울 출생 대한민국의 문학가이다.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이며 아호는 육당(六堂)이다. 신문관의 설립·운영과 잡지 발간을 통해 대중의 계몽 교도를 꾀했으며 창가·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를 열었다. 또한 그 시대의 한문투 중심의 문장들을 구어체로 변환하여 우리말 위주의 글을 쓰도록 선전하고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한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와 규제를 받다가 후에 친일의 길을 걷는다.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활동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생애

  •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
  •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달만에 중퇴
  •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함
  •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임.
  •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함.
  • 1919년 3.1운동독립선언서 작성,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함
  • 1922년 동명사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발행,「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
  •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작품

기타

Domain(A) Range(B) 관계 비고
최남선 3.1운동 A는 B에 참여했다.
최남선 신체시 A는 B를 선보였다.
최남선 친일 A는 B활동에 가담했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김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