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천성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5일 (수) 04:50 판 (생애)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최린은 일제강점기친일파,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78년 1월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주장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고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뒤늦게 참회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저명한 인물이다.

생애

젊은 시절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에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과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학자 도필두[都必斗]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901년부터 서울에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의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된 ‘활빈당’[活貧黨] 및 ‘일심회’[一心會] 등의 관계를 만들며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단체는 망명개화파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단체로 몇몇 인물은 대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지만, 최린은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최린-

최린은 유학을 통해 반일적인 유학생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유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것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의 부흥을 위해 이바지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서로가 합심하면 독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많은 유학생과 국가와 민족의 단결을 통해 국가권력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의 주체적 여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린은 1909년 9월에 귀국하여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천도교단에서 인수한 보성학교 보성중학교에 1911년 2월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독립 운동

변절과 친일 활동

최후

관련 사항

괸련 미디어

[KBS 역사저널 그날] 민족대표 최린은 왜 변절자가 되었나ㅣ KBS 191112 방송

RDF

네트워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