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의숙(錦屛義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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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금병의숙.jpg

김유정이 1931년, 춘천 실레마을에 세운 야학당이다.

설명

위치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 1072 (금병의숙터)

지도를 불러오는 중...

금병의숙 설립 배경

박녹주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데다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또한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녹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녹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야학을 열게 된다.

금병의숙 소개

김유정은 1931년에 자신의 고향인 춘천군 신남면 증리 실레마을에서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이 야학당을 농우회(農友會)라고 하고 농민야학을 펼쳤다.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이라고 고쳐 2년 간이학교도 인가받아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교과내용으로는 한글과 산수, 지리를 가르쳤다. 강원도에서는 강릉의 율곡의숙과 함께 대표적인 야학당이다.

그러나 1933년 서울로 올라가 누이의 집에 의탁하게 되는데, 이때 폐결핵이 발병하게 됨으로써 학교운영은 중단되었다.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 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농우회가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

금병의숙 관련 엽서

금병의숙엽서.jpg

1936년 2월 11일 친구 김학수가 김유정 작가에게 보낸 엽서이다. 자필로 써 보낸 연하장으로 엽서에서는 김학수와 김유정 이 소탈한 친구사이이며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금병의숙엽서2.jpg

엽서를 해석한 것이다. '야학당은 순탄하게 진행된다니 다행일세' 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관련영상

소설가이며 김유정기념사업회의 명예이사장인 전상국님이 고향마을로 다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김유정의 야학당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RDF

표1-1. RDF 표
주어 목적어 서술어
금병의숙 춘천실레마을 위치했다
금병의숙 야학당 ~로 활동했다
금병의숙 문맹퇴치운동 참여했다
금병의숙 농촌계몽운동 참여했다

네트워크그래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8, 1976, 46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0, 1978, 477쪽.

조동걸,『태백항일사』, 강원일보사, 1977, 279~280쪽.

광복회 강원도지부,『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Ⅲ, 1992, 448쪽.

김흥수,『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298쪽.

"1936년에도 '금병의숙' 운영 확인", <김호석>, 2018.11.12,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938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