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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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 궁궐

주제 선정 이유

팀 콘텐츠로 성북구의 문화재를 조사했었는데 성북구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조선시대 문화재가 우리 주위에 많이 남아있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과정 중에 떠오른 것이 궁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여 역사 유물이나 장소를 유적지를 보기 위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녔었다. 그 중 경복궁, 덕수궁 등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고궁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와 이름만 알 뿐 다른 정보들은 알고 있지 못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대다수 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서울에 위치한 조선의 4대 궁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주제로 선정하였다.




경복궁

경복궁 이야기

  •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처져, 왕도인 한양(서울)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구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의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 경복궁의 특징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광화문

광화문경복궁의 남문으로 현재 세종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정부청사 건물들이 쭉 늘어서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하게 광화문 앞은 의정부와 이조, 형조, 예조 등 육조 건물들이 들어섰던 관청거리였다. 조선의 신하들을 해치를 바라보며 오늘도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리라 다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광화문은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일제강점기에는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는 수모를 당하고 한국 전쟁 때는 포화를 맞았었다, 그러다 1968년 복원하였으나 목재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잘못된 위치에 세워지고 말았다. 다행히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광화문은 1867년 고종임금님이 중건 했을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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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근정전 앞에 두 개의 기단이 보이는데, 이것을 '월대'라고 한다. 이 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동물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임금님의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게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지붕 위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일행들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데 이것을 잡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기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쌍쌍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번성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근정전 기단 위에는 무쇠그릇이 놓여있는데 '드므'라고 불리며 화재를 막기위해 두었다.

경회루

경회루는조선의 누각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과거에는 현재의 모습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고 한다. 돌기둥마다 꿈틀대는 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270여년이 지난 고종임금님 때에 다시 지어졌다. 그때 화재로부터 경회루를 지켜달라는 의미로 청동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1997년 경회룽 연못 공사 과정중 물을 모두 뺏더니 청동용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용은 현재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양편에는 쇠를 먹어버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불가사리가 앉아 있는데 한 녀서의 코가 훼손되어있다. 마지막으로 경회루는 주로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많이 열리던 장소로 중국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무과시험도 펼쳐진 장소였다.


덕수궁


덕수궁 이야기

  •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으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군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덕수궁의 특징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지은 연회와 휴식의 공간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정관헌을 자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정관헌이 서양 건축에 전통양식을 섞어 지은 전각이라면,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한문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으로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와 달리 1906년 이름을 고쳐 단 대한문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 대한문의 위치는 처음자리했던 곳이 아니다. 원래는 도로 앞쪽으로 33미터 남짓되는 곳이 자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태평로 길이 크게 뚫리면서 덕수궁 영역의 동쪽 부분이 크게 잠식당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또 다시 궁궐담장 뒤로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대한문만 홀로 서있게 되었다. 대안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이화학당

이화학당은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중 고등과정의 사립여자교육기관으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어렵게 한 여학생을 모집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차츰 정원이 늘었다고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조선시대 말 여학생들을 모집하여 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1887년 학생들이 7명으로 늘어나자 고종황제가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준다. 이화학당의 학생 구성은 개화지사의 자녀와 부인 등 소수의 상류계끕 출신과 서민자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화학당은 유교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말 여성교육과 남녀평등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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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성당

조선 고종 27년에 성공회 1대 주교인 코프의 전도활동으로 성공회의 기초가 잡히게 되자,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왕세자가 교육을 받던 수학원 터와 인접한 곳에 성공회성당을 건립하였다. 성공회 성당은 1922년에 영국인아서 딕슨에 의해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 건축 당시는 일제식문지 시절이여서 원래의 '큰 십자가'형의 설계대로 못 짓고, '작은 일자형'으로 축소되어 건축되었다. 최근에 우연히 영국 렉싱턴 지역의 박물관에서 원래의 설계도가 발견됨으로써, 원 설계도에 따라 건축되었다.


창덕궁


창덕궁 이야기

  •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 창덕궁의 특징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자연의 산세를 갈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따.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란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라는 의미로, 덕치를 숭상한 조선 임금(왕조)의 의지를 담고 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월대라고 하는 돌로 쌓은 높은 대에 올려 있고, 그 한 가운데 임금의 길인 어도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궁궐의 문은 모두 세 칸이지만 돈화문은 다섯 칸이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 칸짜리 대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을 의식해 양쪽 끝의 문을 닫아두었지만 외관만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져있다. 그리고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때만 사용되는 상징적인 문으로 평소 신하나 군사들은 좌우의 담장에 있는 금호문이나 단봉문 등의 작은 문을 이용했었다.

인정전

인정전은 임금님이 계시는 곳으로 국가의 주요 행사읟 대부분이 이곳에서 치뤄졌다. 왕의 즉위식, 세자책복, 왕족의 혼례, 대왕대비의 회갑 같은 경사스러운 일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새해 인사와 외국 사신을 맞이한느 국가적인 행사도 이곳에서 치뤄졌다. 국가와 관련된 중대한 행사가 이루어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부용정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고대 우주관을 반영하는 네모난 연못 속의 동그란 작은 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부용지는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두 다리를 담그고 서 있는 부용정 기둥에는 주련마다 아름다운 시구가 적혀있다. 부용지의 연꽃 향기는 사향처럼 십리에 퍼지고, 연꽃의 맑고 깨끗한 모습은 부처님의 상을 나타내며, 넓은 잎은 신선들의 우산이 되고, 그 위에 구르는 빗방울은 염주가 된다. 즉 부용정을 신선과 부처가 사는 신비스런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용정을 가장 사랑하는 이는 정조였다. 정조는 휴식을 취할 때면 항상 이곳에서 신화들과 낚시를 하거나 술잔을 돌리고, 시 짓기 놀이 등을 즐겼다고 한다.

창경궁


창경궁 이야기

  •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은 원래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며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서 지은 수강궁(壽康宮)으로 태종 사후에 한동안 사용이 되지 않다가 성종 14년(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1483년 ~ 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하여,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 으로 고쳐지어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더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에는 창덕궁의 부속 궁궐로 활용되었으므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전략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훼손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곽만이 복구되었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은 1단계(2015년 ~ 2021년)및 2단계(장기 계획)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덕수궁과 경복궁 또한 동시에 정비되고 있는만큼 예산 부담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길이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

  • 창경궁의 특징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옥천교

이곳은 임금이 머무는 법전에 이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건너라는 공간이다. 다리는 홍예라 불리는 다리기둥 방식과 돌난간으로 이루어져있다. 다리를 받친 기둥에는 도깨비 얼굴을 한 귀면을 조각하고, 상부 난간 엄지기둥에는 서수를 조각하여 물길을 타고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다. 다른 궁궐에도 이러한 다리가 있는데 경복궁은 영제교, 창덕구은 금천교라고 부른다. 1484년 창경궁이 처음 들어설 때 지어진 다리로서 보물 제 386호로 지정되었다.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법전으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 탄 것을 광해군 때에 재건하여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으뜸 전각이다. 명정전에서는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 대에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열었따.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았는데 세조 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등 궁궐의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들을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다. 명정전을 오르는 돌계단 중앙에는 답도가 있는데 답도는 봉황이 새겨있는 사각형 돌을 말한다. 이 외에도 화마를 막기 위하여 명전전 앞에 큰 청동그릇인 '드므'를 설치하고 있다.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으로 팔작지붕을 한 전각이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南向)으로 위치한 전각으로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 또한, 중종과 명종비의 빈(정1품 후궁)의 처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다.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었으나 이괄의 난(亂)과 정조대왕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모습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된 것이다. 장희빈(숙종대왕의 부인)이 복위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死體) 등을 통명전에 주위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다.


  • 통명전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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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작성자 및 라이센스

본 문서 조선의 4대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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