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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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철(1912년 ~ 196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극 배우이다.

생애

1912년 1월 11일, 청양군수를 지낸 황우정의 아들로 충청남도의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말 당시 유명 극단이었던 조선연극사에 연구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때 연극 '청춘난영'의 주인공의 대역으로 발탁되어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마쳤다.

이후 동양극장으로 소속을 옮겨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인기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부역 행위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1942년 7월 일제는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에서 국민연극경연대회라는 것을 열었는데, 국책, 친일 연극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친일 행위에 적극적이서인지는 몰라도, 황철이 이끄는 극단 아랑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개최된 3회의 모든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상을 모두 휩쓸어 갔고 황철은 이 3회의 대회에서 모두 남자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19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시기에 미군전투기의 공습으로 오른쪽 팔을 절단했으나, 의수를 한 채 북한에서 연기 생활을 계속했다.

1961년 사망하여,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됐다.

활동내역

  • 연극 '청춘난영'의 주인공의 대역으로 발탁되었다.
  • 광복 후 극작가 함세덕, 배우 서일성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조직했다.
  • 1948년 8월 월북을 했다.
  • 1955년 8월 북한 최초 인민배우가 되었다. 이후 국립극장 총장과 교육문화성 부상이 되었고,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면서 평양연극영화대학교의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 썼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론서인 '무대화술'과 '분장론'을 저술했다.


작품 및 저서

  • 무대화술
  • 분장론
  • 리순신 장군 -북한에서의 대표작
  • 춘향전 -마지막 작품
  • 물새
  • 동학당
  • 셔먼호
  • 김옥균전
  • 혹뗀 이야기
  • 흥보와 놀보

그의 치부와 후대의 평가

배우로서의 황철은 남한과 북한의 연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자, 1달 동안 연극을 계속 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인 배우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공부하였으며, 그가 집필한 '무대화술'은 남북한을 통틀어 국내에서 저술된 최초의 연기 이론서라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복잡했던 여성 편력이 있는, 여자를 좋아한 배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생긴 스캔들 또한 존재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기록적인 흥행을 구사하면서 황철 본인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때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황철의 심각한 바람기가 그 원인이었다. 당시 사회 관례 상 기생들과의 관계를 가진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치부했는데, 문제는 황철의 불륜의 상대가 극단 후배 여배우인 문정복이라는 사실이었다.

문정복은 황철의 부인 이정순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선배 배우인 양백명의 아내였다. 이 스캔들이 알려지자 황철은 선배 배우의 부인을 뺏은 인간으로 동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실은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아 그의 인기에는 별로 타격이 가지 않았다.

북한의 첫 공훈배우, 인민배우였고, ‘조국 통일상’을 수여 받았다. 황철은 절제된 연기와 풍부한 성량 때문에 근대 우리나라 연극사 최고의 배우로 현재까지 한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황철 낙랑극회 황철은 낙랑극회를 조직했다
황철 월북 황철은 월북에 성공했다
황철 무대화술 황철은 무대화술을 저술했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문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