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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metadata" style="background:#f2f2f2; width:320px; margin: 5px 5px 5px 5px;" cellspacing="10" 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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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fffff; font-size:130%; text-align:center;" | '''김정식(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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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194091;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 '''김정식(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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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김소월.png|3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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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김소월.pn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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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이름''' || 김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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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80px; text-align:center;" |'''본명''' || 김정식(金廷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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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별칭''' ||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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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별칭''' || 김소월(金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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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한문''' || 金素月(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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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출생''' || 1902년 9월 7일 / 평안북도 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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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생몰년''' || 1902년 8월 ~ 193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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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사망''' || 1934년 12월 23일 / [[병사]]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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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출신지''' || 평안북도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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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활동기''' || 1920년 ~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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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직업''' || 시인
 
| style="text-align:center;"|'''직업'''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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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학력''' || 도쿄대학 상과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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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학력''' || [[남산보통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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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중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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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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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상과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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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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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1902년 9월 7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구 문학의 풍조가 범람하던 시기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창작 능력을 인정받아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에 추서되었다.  대표작품은 「[[진달래꽃]]」, 「[[초혼]]」, 「[[접동새]]」, 「[[먼 후일]]」 등이 있으며, 일부 시는 가곡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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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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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 출생.<ref>[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소월(金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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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35 </ref><ref>편집부, 2015, 김소월의 문학과 생애, 문예운동사, 문예운동 2015년 여름 호, p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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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34064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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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조국이 [[일제강점기|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됨. 이때 즈음 유학/한문에 소양이 높은 [[김성도|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 어린 소월은 수많은 민담·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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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남산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 배우기 시작.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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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남산보통학교]] 졸업.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음. 이때 소월 시의 원천이 된 한시·민요·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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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문학부에서 시를 짓기 시작함. 「[[먼 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생애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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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김소월은 [[김억]]의 응원으로 1920년, 그의 나이 18세에 ‘[[창조]]’ 5호에 시를 실으며 등단함.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
*'''1922-1923년'''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학당]] 시절,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히 활동함. 1922년 한 해에만 50여편의 시를 발표, 이 시기 소설가인 [[나도향]]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
*'''1934년'''  12월 23일 평안북도 구성군 자택에서 사망. 죽음의 원인은 마약중독으로 인한 [[병사]]로 추정됨.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健康)한 잠」(1934)·「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
=='''가족'''==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김소월의 작품'''==
+
===가족관계도===
 +
[[파일:Aaass.PNG|500px]]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가족표===
|+ 김소월의 작품리스트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40%;"
|+ style="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
+
!style="width:10%;|이름 || style="width:10%"|관계 || style="width:10%"|비고
!  발표연도  ||제목
 
|-
 
|1920||스승 김억의 소개로 <창조> 5호에 시 '낭인의 봄', '그리워' 등 5편을 발표하며 데뷔, <학생계>에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등으로' 발표
 
|-
 
|1922||배재고보 편입 후 <개벽>지를 통해 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소설 [함박눈] 등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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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영대>에 시 '밭고랑 위에서', '무신' 등, <동아일보>에 시 '나무리벌노래'를 발표
+
|[[홍단실]]||부인||
 
|-
 
|-
|1925||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간행, 시론 '시흔' 발표, <동아일보>에 시 '옷과 밥과 자유', <조선문단>에 시 '물마름' 발표
+
|[[계희영]]||숙모||
 
|-
 
|-
|1939||스승 김억에 의해 [소월시초] 발행
+
|[[김정호]]||아들||다섯째(셋째 아들)
 
|-
 
|-
|1968||남산에 소월시비 세워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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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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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작품을 모두 모아 목록화하였다.<ref>권영민, 김소월 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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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기]를 눌러 수록된 시의 목록을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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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은 김소월이 생전에 유일하게 편찬한 시집이다. 총 16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2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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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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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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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먼 후일]] / [[풀따기]] / 바다 / 산 우헤 / 옛니야기 / 님의 노래 / 실제失題 / 님의 말슴 / 님에게 / 마른 두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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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봄밤 / 밤 / 꿈꾼 그 옛날 / 꿈으로 오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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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눈 오는 저녁 / 자주 구름 / 두 사람 / 닭 소래 / 못 니저 / 예전엔 밋처 몰낫서요 / 지나깨나 안즈나 서나 / 해가 산 마루에 저므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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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무주공산 /꿈 / 맘 켱기는 날 / 하눌끝 / 개아미 / 제비 / 부헝새 / 만리성 /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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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한때 한때 / 담배 / 실제 / 어버이 / 부모 / 후살이 / 니젓든 밤 / 봄비 / 비단안개 / 기억 / 애모 / 몹쓸 꿈 / 그를 꿈꾼 밤 / 여자의 냄새 / 분粉 얼골 /안해 몸 /서울 밤
 +
 +
[6부]- 가을 아츰에 / [[가을 저녁에]] / 반달
 +
 +
[7부]- 맛나려는 심사 / 옛 낫 / 깁피 밋든 심성 / 꿈 / 님과 벗 / 지연 / 오시의 눈 / 셔름의 덩이 / 낙천 / 바람과 봄 / 눈 / 깁고 깁픈 언약 / 붉은 조수 / 남의 나라 땅 / 천리만리 / 생과 사 / 어인 / 귀뚜람이 / 월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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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부]- 불운에 우는 그대여 /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밧 된다고 / 황촉 / 맘에 잇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 훗길 / 부부 / 나의집 / 새벽 /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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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여름의 달밤 / 오는 봄 / 물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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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부]- 우리 집 / 들도리 / 바리운 몸 / 엄숙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잇섯더면 / 밧고랑 우헤서 / 저녁 때 / 합장 / 묵념
 +
 +
[11부]- 고독 / 열락 / 무덤 / 비난수하는 맘 / 찬저녁 / [[초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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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 여수
 +
 +
[13부]- [[진달래꽃|진달내꼿]] / 개여울의 노래 / [[길(김소월)|길]] / 개여울 / 가는 길 / 왕십리 / 원앙침 / 무심 / 산 / 삭주구성 / 널 / 춘향과 이도령 / [[접동새]] / 집 생각 / [[산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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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부]- 꼿촉불 켜는 밤 / 부귀공명 / 추회 / 무신 / 꿈길 / 사노라면 / 사람은 죽는 것을 / 하다못해 / 죽어달 내가 올나 / 희망 / 전망 /나는 세상모르고 사랏노라
 +
 +
[15부]- 금잔듸 / 강촌 / 첫 치마 / 달마지 / 엄마야 누나야
 +
 +
[16부]- 닭은 꼬꾸요
 +
</div>
 +
</div>
 +
 +
*[[『소월시초』]]는 김소월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스승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모아 엮은 것이다. [[『진달래꽃』]]과 겹치지 않는 19편의 시를 목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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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 mw-collapsed" style="width:500px">
 +
'''『소월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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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
팔배개 노래조 / 차 안서선생 삼수갑산 운 / 제비 / 장별리 / 고적한 날 / 신앙 / 고만두풀 노래를 가져 月灘에게 드립니다 / 해 넘어 가기 전 한참은 / 생과 돈과 사 / 돈타령 / 기분전환 / 제이ㆍ엠ㆍ에쓰<ref>[[조만식]]을 생각하고 쓴 시이다.</ref> / 기원 / 건강한 잠 / 상쾌한 아츰 / 기회 / 고향 / 고락 /의와 정의심
 +
</div>
 +
</div>
  
=='''수상내역'''==
+
*[[『진달래꽃』]]과 [[『소월시초』]]에 수록되지 않은 65편의 작품을 목록화하였다.
*1981년 - 금관문화훈장
+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 mw-collapsed" style="width:500px">
 +
'''미수록 작품'''
 +
<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
낭인의 봄 / 야夜의 우적雨適 / 오과午過의 읍泣 / 그리워 / 춘강 / 거츤 플 허트러진 모래동으로 / 죽으면? / 이 한밤 / 사학월 / 은대촉 / 문견폐 / 춘채사 / 함구 / 일야우一夜雨 / 하눌 / 등불과 마조 안젓스랴면 / 공원의 밤 / 맘에 속읫사람 / 가을 가는 봄 삼월 / 꿈자리 / 깁흔 구멍 / 길손 / 달밤 / 눈물이 쉬루르 흘러납니다 / 어려 듯고 자라 배와 내가 안 것은 / 나무리벌 노래 / 차車와 선船 / 이요俚謠
 +
항전애창명주딸기
 +
불칭추칭 / ?님을 따라가다가 꿈 깨여 탄식함이라 / 옷 / 배 / 가막덤불 / 옷과 밥과 자유 / 자전거 / 불탄 자리 / 5일 밤 산보 / 비소리 / 돈과 밥과 맘과 들 / 잠 / 첫눈 / 봄 못 / 둥근 해 / 바다까의 밤 / 져녁 / 흘러가는 물이라 맘이 물이면 / 칠석 / 대수풀 노래 / 생의 감격 / 길차부 / 단장 1 / 단장 2 / 드리는 노래 / 고독 / 박넝쿨 타령 / 늦은 가을비 / 기억 / 절제 / 술 / 빗 / 성색聲色 / 술과 밥 / 세모감
 +
</div>
 +
</div>
  
*1999년 -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
*[[김소월]]은 생전에 중국의 한시를 번역하는 국역 작업도 열심히 하였다. 아래 목록은 그가 직접 번역한 작품 12편을 모은 것이다.
 +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 mw-collapsed" style="width:500px">
 +
'''한시 번역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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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
한식 / 춘효 / 밤가마귀 / 진회에 배를 대고 / 봄 / 소소소 무덤 / 나홍곡 / 이주가伊州歌 1 / 이주가伊州歌 2 / 장간행 / 위성조우 / 해 다 지고 날점으니
 +
</div>
 +
</div>
  
 +
*문학사상에서 발굴한 [[김소월]]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 8편을 목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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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 mw-collapsed" style="width:500px">
 +
'''미발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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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
가련한 인생 / 니불 / 마음의 눈물 / 벗과 벗의 넷님 / 봄과 봄밤과 봄비 / 봄바람 / 비 오는 날 / 인종
 +
</div>
 +
</div>
  
=='''참고자료'''==
+
=='''작품 세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1490&cid=41708&categoryId=41713 네이버 지식백과 - 김소월]
 
  
[https://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A%B9%80%EC%86%8C%EC%9B%94&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03236 네이버 인물검색 - 김소월]
+
===<big>작품 경향</big>===
 +
 
 +
소월의 작품 세계는 '한의 정서' 에서 비롯된다. 그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민족적 배경과 순탄하지 않았던 가정사가 소월 시에 나타나는 '한의 정서'의 기반이 되었다.
 +
소월은『[[먼 후일]]』에서 임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었노라'라는 [[반어적 표현]]으로 반복함으로써 한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진달래꽃]]」에서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진심을 대신하여 임을 보내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 말한다. 그립고 슬픈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한'으로 이어져 독자의 가슴에 사무쳤다. 한 맺혀 응어리진 마음은 동시에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
 +
소월의 또다른 시 「[[길(김소월)|길]]」에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 나라를 잃고 몸과 마음 둘 곳 하나 없었던 처지를 드러낸다.「[[길(김소월)|길]]」에서의 '한'은 [[일제강점기|억압과 탄압의 시대]] 를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다.
 +
이처럼 소월 시에서 나타나는 '한의 정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임과의 이별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한'과 조국을 잃은 비애로부터 표출되는 '한'이다. 하지만 이 두 갈래의 감정을 명확히 구분 짓기는 어렵다. '한'에는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원망·안타까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얽혀있다. [[일제강점기|일제의 탄압]]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좋지 못했던 소월의 가정사를 고려한다면, 소월 시에 등장하는 '한'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토해낸 울분이라고 할 수 있다.<ref>홍용희. (2019). ‘근대화된 민요시’와 세계조선시인의 탄생 - 김소월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60), 343-36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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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와 「님에게」라는 시를 보면, 여성이 임을 그리워하며 시를 작성한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대부분의 시적 화자를 당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으로 설정했다. 「초혼」처럼 남성적 절규를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극히 예외적이고, 그의 시 대부분은 상처 입은 여성의 애절한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수동적 여성이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시를 전개하여 민요적 특성을 강화했고, 애절한 마음을 섬세하게 형상화하여 서정적 완결성을 높였다. 작품 초기에는 개인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여성적 정조를 활용하는 경향이 보인다. [[3·1운동]] 실패 이후 고문당하는 동료들과 와해하는 [[오산중학교]]를 보며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고, 이 감정을 사랑에 대한 서러움(정념)으로 비유하여 통탄한 감정을 표출했다. 이렇게 주체를 잃고 방황하는 현실에서 '님', '그 여자', '그대' 등의 소재를 활용하여 존재 방안을 모색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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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작품 후반부로 가면 [[일제강점기|식민지]]의 안타까운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독자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비오는 날」, 「가혹한 인생」, 「봄바람」 등의 시에서 [[일제강점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처지를 직시하며 연대를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소월의 여성적 정조 활용은 일제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연애 담론’으로 우회해서 표현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한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ref>박군석. (2018). 김소월의 시에 나타난 내면의 타자, ‘그 여자’의 현현. 한국시학연구, (56), 9-5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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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문학사적 가치</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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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대표적인 민요시인</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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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상황 속에서 지배 논리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주의 이념을 '민요'의 형태로 승화했고, 이를 기반으로 '민요적 근대시'라는 형식을 창조해냈다. 그는 시에 [[민요적 율격]]을 담아내며 민족 고유의 전통을 모색하고 계승하려는 정신사적 의지를 드러냈고, 전통적 정서와 율격의 기반 위에서 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애환을 표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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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민요적 율격|민요적 특성]]을 차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개성이 담긴 자유시로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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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근대시 형식 구축</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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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은 시 전반에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 서정시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는 구시대의 문화적 규범이 붕괴되고 서구의 근대 자유시가 무분별하게 쇄도하던 문학적 혼란기에 현대시를 한국의 전통과 접맥시켜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서구의 낭만주의라는 두 이념을 조화롭게 융화하여 문학 속에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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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례가 없던 장르에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새롭게 도전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실험적인 시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많은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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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내면의 형상화를 통한 회복</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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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또다른 문학사적 가치는 '현실'과 '대중'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소월 시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외래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전통의 것으로 눈을 돌리는 현실성의 회복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변화는 당시 [[카프]] 문학 의 전개뿐만 아니라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 [[자기동일성]] 회복의 과정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김소월은 전통적 정서 와 율격의 기반 위에 개인의 내면을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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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평가</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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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 - 김용직 <ref>김용직 (1997년 9월 30일). 《한국현대문학의 사적 탐색》.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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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 - 조연현 <ref>조연현 (1969년 9월 5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성문각. 43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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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특성|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 - 조병춘 <ref>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1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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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ref> 김윤식·김현 (초판 1973-08-30, 개정판 1996-09-10). 《한국문학사》. 서울: 민음사. 2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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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ref>유종호 (1995년 5월 25일).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8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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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가곡으로 창작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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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 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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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합창단 - 못잊어 || 김소월 작시 가곡 2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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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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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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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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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휴머니티 헌터]]</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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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 [[박소연]], [[유성운]], [[이호영]]
  
작성자 : 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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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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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배재고등보통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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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도쿄상과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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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금관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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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근대 문인]]

2022년 6월 16일 (목) 00:02 기준 최신판

개요

김소월(1902년 9월 7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구 문학의 풍조가 범람하던 시기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창작 능력을 인정받아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에 추서되었다. 대표작품은 「진달래꽃」, 「초혼」, 「접동새」, 「먼 후일」 등이 있으며, 일부 시는 가곡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생애

  •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 출생.[1][2]
  • 1905년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됨. 이때 즈음 유학/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 어린 소월은 수많은 민담·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됨.
  • 1915년 남산보통학교 졸업.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음. 이때 소월 시의 원천이 된 한시·민요·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됨.
  • 1916년 문학부에서 시를 짓기 시작함. 「먼 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 1920년 김소월은 김억의 응원으로 1920년, 그의 나이 18세에 ‘창조’ 5호에 시를 실으며 등단함.
  • 1922-1923년 배재학당 시절,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히 활동함. 1922년 한 해에만 50여편의 시를 발표, 이 시기 소설가인 나도향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
  • 1934년 12월 23일 평안북도 구성군 자택에서 사망. 죽음의 원인은 마약중독으로 인한 병사로 추정됨.

가족

가족관계도

Aaass.PNG

가족표

이름 관계 비고
홍단실 부인
계희영 숙모
김정호 아들 다섯째(셋째 아들)

작품 목록

김소월의 작품을 모두 모아 목록화하였다.[3]
[펼치기]를 눌러 수록된 시의 목록을 자세히 볼 수 있다.
  • 『진달래꽃』은 김소월이 생전에 유일하게 편찬한 시집이다. 총 16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2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진달래꽃』

[1부]- 먼 후일 / 풀따기 / 바다 / 산 우헤 / 옛니야기 / 님의 노래 / 실제失題 / 님의 말슴 / 님에게 / 마른 두덕에서

[2부]- 봄밤 / 밤 / 꿈꾼 그 옛날 / 꿈으로 오는 한 사람

[3부]- 눈 오는 저녁 / 자주 구름 / 두 사람 / 닭 소래 / 못 니저 / 예전엔 밋처 몰낫서요 / 지나깨나 안즈나 서나 / 해가 산 마루에 저므러도

[4부]- 무주공산 /꿈 / 맘 켱기는 날 / 하눌끝 / 개아미 / 제비 / 부헝새 / 만리성 /수아

[5부]- 한때 한때 / 담배 / 실제 / 어버이 / 부모 / 후살이 / 니젓든 밤 / 봄비 / 비단안개 / 기억 / 애모 / 몹쓸 꿈 / 그를 꿈꾼 밤 / 여자의 냄새 / 분粉 얼골 /안해 몸 /서울 밤

[6부]- 가을 아츰에 / 가을 저녁에 / 반달

[7부]- 맛나려는 심사 / 옛 낫 / 깁피 밋든 심성 / 꿈 / 님과 벗 / 지연 / 오시의 눈 / 셔름의 덩이 / 낙천 / 바람과 봄 / 눈 / 깁고 깁픈 언약 / 붉은 조수 / 남의 나라 땅 / 천리만리 / 생과 사 / 어인 / 귀뚜람이 / 월색

[8부]- 불운에 우는 그대여 /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밧 된다고 / 황촉 / 맘에 잇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 훗길 / 부부 / 나의집 / 새벽 / 구름

[9부]- 여름의 달밤 / 오는 봄 / 물마름

[10부]- 우리 집 / 들도리 / 바리운 몸 / 엄숙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잇섯더면 / 밧고랑 우헤서 / 저녁 때 / 합장 / 묵념

[11부]- 고독 / 열락 / 무덤 / 비난수하는 맘 / 찬저녁 / 초혼

[12부]- 여수

[13부]- 진달내꼿 / 개여울의 노래 / / 개여울 / 가는 길 / 왕십리 / 원앙침 / 무심 / 산 / 삭주구성 / 널 / 춘향과 이도령 / 접동새 / 집 생각 / 산유화

[14부]- 꼿촉불 켜는 밤 / 부귀공명 / 추회 / 무신 / 꿈길 / 사노라면 / 사람은 죽는 것을 / 하다못해 / 죽어달 내가 올나 / 희망 / 전망 /나는 세상모르고 사랏노라

[15부]- 금잔듸 / 강촌 / 첫 치마 / 달마지 / 엄마야 누나야

[16부]- 닭은 꼬꾸요

『소월시초』

팔배개 노래조 / 차 안서선생 삼수갑산 운 / 제비 / 장별리 / 고적한 날 / 신앙 / 고만두풀 노래를 가져 月灘에게 드립니다 / 해 넘어 가기 전 한참은 / 생과 돈과 사 / 돈타령 / 기분전환 / 제이ㆍ엠ㆍ에쓰[4] / 기원 / 건강한 잠 / 상쾌한 아츰 / 기회 / 고향 / 고락 /의와 정의심

미수록 작품

낭인의 봄 / 야夜의 우적雨適 / 오과午過의 읍泣 / 그리워 / 춘강 / 거츤 플 허트러진 모래동으로 / 죽으면? / 이 한밤 / 사학월 / 은대촉 / 문견폐 / 춘채사 / 함구 / 일야우一夜雨 / 하눌 / 등불과 마조 안젓스랴면 / 공원의 밤 / 맘에 속읫사람 / 가을 가는 봄 삼월 / 꿈자리 / 깁흔 구멍 / 길손 / 달밤 / 눈물이 쉬루르 흘러납니다 / 어려 듯고 자라 배와 내가 안 것은 / 나무리벌 노래 / 차車와 선船 / 이요俚謠 항전애창명주딸기 불칭추칭 / ?님을 따라가다가 꿈 깨여 탄식함이라 / 옷 / 배 / 가막덤불 / 옷과 밥과 자유 / 자전거 / 불탄 자리 / 5일 밤 산보 / 비소리 / 돈과 밥과 맘과 들 / 잠 / 첫눈 / 봄 못 / 둥근 해 / 바다까의 밤 / 져녁 / 흘러가는 물이라 맘이 물이면 / 칠석 / 대수풀 노래 / 생의 감격 / 길차부 / 단장 1 / 단장 2 / 드리는 노래 / 고독 / 박넝쿨 타령 / 늦은 가을비 / 기억 / 절제 / 술 / 빗 / 성색聲色 / 술과 밥 / 세모감

  • 김소월은 생전에 중국의 한시를 번역하는 국역 작업도 열심히 하였다. 아래 목록은 그가 직접 번역한 작품 12편을 모은 것이다.

한시 번역 작품

한식 / 춘효 / 밤가마귀 / 진회에 배를 대고 / 봄 / 소소소 무덤 / 나홍곡 / 이주가伊州歌 1 / 이주가伊州歌 2 / 장간행 / 위성조우 / 해 다 지고 날점으니

  • 문학사상에서 발굴한 김소월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 8편을 목록화하였다.

미발표 작품

가련한 인생 / 니불 / 마음의 눈물 / 벗과 벗의 넷님 / 봄과 봄밤과 봄비 / 봄바람 / 비 오는 날 / 인종

작품 세계

작품 경향

소월의 작품 세계는 '한의 정서' 에서 비롯된다. 그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민족적 배경과 순탄하지 않았던 가정사가 소월 시에 나타나는 '한의 정서'의 기반이 되었다.
소월은『먼 후일』에서 임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었노라'라는 반어적 표현으로 반복함으로써 한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진달래꽃」에서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진심을 대신하여 임을 보내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 말한다. 그립고 슬픈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한'으로 이어져 독자의 가슴에 사무쳤다. 한 맺혀 응어리진 마음은 동시에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월의 또다른 시 「」에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 나라를 잃고 몸과 마음 둘 곳 하나 없었던 처지를 드러낸다.「」에서의 '한'은 억압과 탄압의 시대 를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소월 시에서 나타나는 '한의 정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임과의 이별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한'과 조국을 잃은 비애로부터 표출되는 '한'이다. 하지만 이 두 갈래의 감정을 명확히 구분 짓기는 어렵다. '한'에는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원망·안타까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얽혀있다. 일제의 탄압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좋지 못했던 소월의 가정사를 고려한다면, 소월 시에 등장하는 '한'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토해낸 울분이라고 할 수 있다.[5]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와 「님에게」라는 시를 보면, 여성이 임을 그리워하며 시를 작성한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대부분의 시적 화자를 당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으로 설정했다. 「초혼」처럼 남성적 절규를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극히 예외적이고, 그의 시 대부분은 상처 입은 여성의 애절한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수동적 여성이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시를 전개하여 민요적 특성을 강화했고, 애절한 마음을 섬세하게 형상화하여 서정적 완결성을 높였다. 작품 초기에는 개인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여성적 정조를 활용하는 경향이 보인다. 3·1운동 실패 이후 고문당하는 동료들과 와해하는 오산중학교를 보며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고, 이 감정을 사랑에 대한 서러움(정념)으로 비유하여 통탄한 감정을 표출했다. 이렇게 주체를 잃고 방황하는 현실에서 '님', '그 여자', '그대' 등의 소재를 활용하여 존재 방안을 모색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반면 작품 후반부로 가면 식민지의 안타까운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독자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비오는 날」, 「가혹한 인생」, 「봄바람」 등의 시에서 일제강점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처지를 직시하며 연대를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소월의 여성적 정조 활용은 일제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연애 담론’으로 우회해서 표현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한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6]

문학사적 가치

  • 대표적인 민요시인
식민지 상황 속에서 지배 논리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주의 이념을 '민요'의 형태로 승화했고, 이를 기반으로 '민요적 근대시'라는 형식을 창조해냈다. 그는 시에 민요적 율격을 담아내며 민족 고유의 전통을 모색하고 계승하려는 정신사적 의지를 드러냈고, 전통적 정서와 율격의 기반 위에서 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애환을 표현였다. 
 단순히 민요적 특성을 차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개성이 담긴 자유시로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근대시 형식 구축
김소월은 시 전반에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 서정시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는 구시대의 문화적 규범이 붕괴되고 서구의 근대 자유시가 무분별하게 쇄도하던 문학적 혼란기에 현대시를 한국의 전통과 접맥시켜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서구의 낭만주의라는 두 이념을 조화롭게 융화하여 문학 속에 반영한 것이다.
 선례가 없던 장르에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새롭게 도전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실험적인 시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많은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다.
  • 내면의 형상화를 통한 회복
김소월의 또다른 문학사적 가치는 '현실'과 '대중'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소월 시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외래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전통의 것으로 눈을 돌리는 현실성의 회복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변화는 당시 카프 문학 의 전개뿐만 아니라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 자기동일성 회복의 과정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김소월은 전통적 정서 와 율격의 기반 위에 개인의 내면을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평가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 - 김용직 [7]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 - 조연현 [8]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 - 조병춘 [9]
"김소월의 시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10]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11]

관계도

네트워크 그래프

RDF

Domain(A) Range(B) 관계 설명
김소월 김성도 자랐다 A가 B에게 자랐다.
김소월 계희영 자랐다 A가 B에게 자랐다.
김소월 나도향 어울렸다 A가 B와 어울렸다.
김소월 김억 가르침받다 A가 B에게 가르침받다.
김소월 3.1운동 참여했다 A는 B에 참여했다.
김소월 카프 활동했다 A는 B에서 활동했다.
김소월 관동대지진 겪었다 A는 B를 겪었다.
김소월 오산중학교 재학했다 A는 B에 재학했다.
김소월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했다 A는 B를 졸업했다.
김소월 도쿄대학교 졸업했다 A는 B를 졸업했다.
김소월 진달래꽃 출간했다 A는 B를 출간했다.
김소월 평안북도 구성군 태어났다 A는 B에서 태어났다.
김소월 표현했다 A는 B를 표현했다.
김소월 애환 표현했다 A는 B를 표현했다.
김소월 사랑 표현했다 A는 B를 표현했다.

2차 창작

김소월의 시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가곡으로 창작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다.

김소월 가곡
국립합창단 - 못잊어 김소월 작시 가곡 20곡

참고문헌

  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소월(金素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35
  2. 편집부, 2015, 김소월의 문학과 생애, 문예운동사, 문예운동 2015년 여름 호, p20-27.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340644
  3. 권영민, 김소월 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
  4. 조만식을 생각하고 쓴 시이다.
  5. 홍용희. (2019). ‘근대화된 민요시’와 세계조선시인의 탄생 - 김소월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60), 343-369.
  6. 박군석. (2018). 김소월의 시에 나타난 내면의 타자, ‘그 여자’의 현현. 한국시학연구, (56), 9-53.
  7. 김용직 (1997년 9월 30일). 《한국현대문학의 사적 탐색》.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9쪽.
  8. 조연현 (1969년 9월 5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성문각. 438쪽.
  9. 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13쪽.
  10. 김윤식·김현 (초판 1973-08-30, 개정판 1996-09-10). 《한국문학사》. 서울: 민음사. 240쪽.
  11. 유종호 (1995년 5월 25일).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81쪽.

기여자

휴머니티 헌터
김세연, 박소연, 유성운, 이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