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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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3일 (수) 23:37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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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은 한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수필가다.

호는 근원(近園)·선부(善夫)·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이다.

생애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은 1904년 2월 3일 경북 선산(善山)에서 아버지 김이도(金以燾)와 어머니 김옥순(金玉順) 사이에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3년에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함께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도화교실에서 이종우(李鍾禹)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할 정도로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2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시절에 진숙경(秦淑卿)을 만나 1926년에 결혼했으며 곧 이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김용준은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을 만나 후에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1937년 보성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3월 딸 석란(夕蘭)을 입양했다. 1944년, 결핵을 앓게 되어 성북동 자택인 '노시산방(老枾山房)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에게 넘겨주고 의정부로 이주했다.

1950년 6ㆍ25 전쟁 발발 후 월북 후 1967년 향년 64세로 작고하였다.

작품세계(활동내역)

1927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그의 첫 미술론인 「화단개조(畫壇改造)」, 「무산계급회화론」 등에서 이러한 그가 동경미술학교 재학 초기에 당시 일본 전위 작가들에 의해 수용되었던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일시적으로 경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3달 뒤에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을 통해 이전에 주장했던 논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가 왜 사상적 경향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을 통해 소개되었던 다양한 서구의 예술이념과 정치사회적 이념에 대해 충분한 이해 없이 성급하게 근대문화의 수용과 자주라는 과제를 동시에 지향하고자 했던 한국문예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931년 2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회 향토회 전람회’, 제2회 서화협전(書畫協展)’, 동미전(東美展)’등에 작품을 출품하며 「동미전과 녹향전(錄鄕展)」, 「서화협전의 인상」, 「미술에 나타난 곡선(曲線) 표징(表徵)」, 「화단 일 년의 회고」등의 글을 발표하며 당시 한국화단의 주요 논제였던 '조선향토색론'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수필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와 같이 미술과 삶에 대한 수필을 꾸준히 발표하였으며, 이 글들은<근원수필>로 엮어졌다.

1942년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론」, 「김만형(金晩炯) 군의 예술」를 통해 당대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글을 썼다. 1946년 서울대 회화과 교수에 취임하여 「명일의 조선미술」(1946), 「민족문화문제」(1947), 「광채 나는 전통」(1947)등의 문화예술론을 발표했으며, 1948년 6월 그의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했다.

1948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을유문화사)를 출간하고 「고미술 계몽의 의의」, 「국전의 인상」, 「신사실파의 미」를 발표하여 전통미술과 현대미술뿐 아니라 국전이라는 새로운 전시체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드러냈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며 1951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과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62년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해 「조선화의 채색법」를 발표하고『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전통미술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작품 및 저서

동십자각(東十字閣), <건설이냐 파괴냐>

작품 설명

경복궁의 동십자각이라는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으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는 공사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김용준이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된 작품이다.

1924년, 캔버스에 유채, 크기 미상.








달리아와 백일홍

작품 설명

달리아와 백일홍은 개화 이후 새로이 수입된 식물이였는데, 이를 김용준이 그린 그림이다 1930년, 캔버스에 유채, 60.0×41.0cm, 개인 소장











자화상

작품 설명

동경미술학교에 재학 중이던 20대의 젊은 시절의 김용준을 그린 자회상이다. 당시 그는 자신을 낭만주의 작가로 평했는데, 이 그림에서 알 수있는 거친 필치나 어두운 조명을 배경으로 소재의 일부분에만 집중 조명한 기법을 볼 때, 그가 말하는 낭만주의는 표현주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 같다.

1930년, 캔버스에 유채, 60.3×45.0cm, 일본 동경예술대학 예술자료관 소장.








송로석불로(松老石不老)

작품 설명

완당 김정희의 필의를 추구한 그림이나, 전통적인 준법을 사용하기보다 김용준 나름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적갈색으로 면을 채색하고 묵점으로 껍질을 표현한 소나무의 모습에서 독특한 기법을 볼 수 있다.

1941년, 수묵담채, 15.5×41.5cm(선면).







문방정취(文房情趣)

작품 설명

그림 안에“임오년(壬午年) 유하월(榴夏月, 오월)에 노시산방에서 그리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42년, 종이에 수묵과 담채, 개인 소장









문방부귀(文房富貴)

작품 설명

그림 안에“때는 계미년(癸未年) 봄날, 오각(吾覺) 대아(大雅)를 위해서”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43년, 종이에 수묵과 담채, 개인 소장






강산무한호(江山無限好)

작품 설명

그림 안에“임오년(壬午年) 유하월(榴夏月, 오월)에 노시산방에서 그리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42년, 종이에 수묵과 담채, 개인 소장






수화소노인가부좌상

작품 설명

수화소노인가부좌상은 근원 김용준이 수향산방(노시산방)에서 수화 김환기를 그린 그림이다. 1947년 4월 어느날, 근원이 수향산방(노시산방)에 놀러가서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깡마른 체구, 거구에 안경을 쓴 김환기의 모습에 예술가적 기품이 담겨있으며, 김환기의 특정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수화가 부산영도다리 근처에서 살던 시절 산정(서세옥)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던 그림이라고 보여주었다는 그 그림이다. 수화가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도 근원의 이 그림을 고이 간직했다는 것을 보아, 근원을 향한 수화의 각별한 마음을 알 수있다.

















매화

작품 설명

그림 안에 “매화와 더불어 벗이 되고 싶어 매화 가지 몇 개를 그려 곽건당(郭健堂) 형의 부탁에 응하였으나, 속된 화사(畵師)의 화법을 면치 못했구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948년, 종이에 수묵, 26.5×18.0cm.

기타(수상내역)

관련항목

참고문헌 및 각주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