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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실존주의 철학를 기반으로 한 연극들이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실존주의 연극들은 당시 전후세대의 정신적 허무감에 공명을 일으켜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후 실존주의 연극으로 볼 수 있는 창작극들이 등장한다. 부조리극의 수용은 이러한 1950년대의 실존주의 연극 등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실존주의 철학를 기반으로 한 연극들이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실존주의 연극들은 당시 전후세대의 정신적 허무감에 공명을 일으켜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후 실존주의 연극으로 볼 수 있는 창작극들이 등장한다. 부조리극의 수용은 이러한 1950년대의 실존주의 연극 등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부조리극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부조리극의 국내 수용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 1970년대 초 까지는 번역극 상영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도입단계이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까지는 창작극 상연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정착단계이다. 이 시기에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수용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극단 산울림]],[[드라마센터]],[[자유극장]] 등의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소개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동인제극단의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부조리극으로 채워졌다. 1960~1970년대 초반에 소개된 부조리극은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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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부조리극의 국내 수용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 1970년대 초 까지는 번역극 상영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도입단계이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까지는 창작극 상연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정착단계이다. 이 시기에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수용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극단 산울림]],[[드라마센터]],[[극단 실험극장]] 등의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소개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동인제극단의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부조리극으로 채워졌다. 1960~1970년대 초반에 소개된 부조리극은 헤아릴 수 없다.   
  
 
=='''부조리극 특징'''==
 
=='''부조리극 특징'''==

2018년 6월 17일 (일) 01:45 판

부조리극[Absurdes Theater]

정의

부조리극은 현대문명 속을 살아가는 현대 인간의 존재와 삶의 문제들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소재로 삼은 연극장르이다. 현대적인 실험 형태와 성격을 지닌 모든 희곡과 연극을 총칭하는 개념으로써 이전의 환상적,심리적 혹은 사실주의적 전통극과 반대된다. 애드워드 올비(E.ALBee)는 부조리극을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한 예술로써 인간의 허구적 환영을 지탱하는 도덕적,종교적,정치적,사회적, 구조의 붕괴로 의미가 소실된 세계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연극이라고 정의하였다. 부조리극반연극,전위(Avantgarde)로도 불린다.

부조리극의 역사

기원

부조리극의 탄생은 20세기 서구인이 처한 존재론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언한 후 새로운 신은 탄생되지 않았다. 가치 기준이 될 신의 부재로 인해 인간은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에 기반한 물질문명의 대두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휴머니즘 전통을 폐기하고 인간을 수량화된 기계로 환원시킨다. 그 결과 두차례의 전쟁이 일어났고 서구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을 촉발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이 탄생하였다. 부조리극은 주제의 측면에서 실존주의 철학에 기대고 있다. 부조리(absurd)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실존주의'철학을 탄생시킨 카뮈이다. 카뮈는 '인간과 삶, 그리고 배우와 무대 사이의 단절'로 인해 발생하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을 두고 부조리(absurd)라고 정의하였고 이러한 실존적 소외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데에서 부조리극은 탄생되었다. 부조리극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비평가 마틴 에슬린(M.Esslin)이 처음으로 언급했다.

한국의 부조리극 수용과정

1950년대 실존주의 철학를 기반으로 한 연극들이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실존주의 연극들은 당시 전후세대의 정신적 허무감에 공명을 일으켜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후 실존주의 연극으로 볼 수 있는 창작극들이 등장한다. 부조리극의 수용은 이러한 1950년대의 실존주의 연극 등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부조리극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부조리극의 국내 수용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 1970년대 초 까지는 번역극 상영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도입단계이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까지는 창작극 상연의 단계로 부조리극의 정착단계이다. 이 시기에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수용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극단 산울림,드라마센터,극단 실험극장 등의 동인제극단은 부조리극 소개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동인제극단의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부조리극으로 채워졌다. 1960~1970년대 초반에 소개된 부조리극은 헤아릴 수 없다.

부조리극 특징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