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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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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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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개벽(開闢)』지의 사원으로 입사 후, 약 10년간 창작 생활에 전념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발(髮)」이 3등으로 입선되어 작가 생활이 비롯되었는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목되었다.그는 예술파의 작가로 평판되었고 당대 일본 문단의 신흥예술파를 적극적으로 소개(新東亞, 1932.11.)하기도 하였다. 전기에는 신변, 가정사를 제재로 한 심리 추구가 주조를 이룬 「연기(煙氣)」(1933)·「명상(瞑想)」(1937) 등을 발표했다.후기에는 거의 개인적인 주변의 일을 다룬 작품으로, 「소년과 기생」(1937)·「온실(溫室)」(1939) 등이 거론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악마(惡魔)」(1935)·「우울」(1935)·「향기(香氣)」(1936)·「그날 밤에 생긴 일」(1938)·「겸허(謙虛) 김유정전」(1939)·「탁류(濁流)를 헤치고」(1940) 등이 있다.이들 소설들은 그의 평론 「본격소설론-진실과 통속성에 관한 제언」(1937)에서 소설의 목표를 인생의 묘사, 특히 ‘인생의 단면’의 묘사에 있다고 한 것과 ‘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와 결혼과 문학’이라고 하였던 논리와 상통한다.1944년 9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북구주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소설부 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작품은 「폭풍(暴風)의 역사」(1947)와 「농민의 비애(悲哀)」(1948) 등으로 이를 통하여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다.1947년 월북 후, 별로 뚜렷한 작품 활동이 없었고 문단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본래 프로문학 작가가 아니었던 그로서는 북한의 문학 이념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문필 활동이 중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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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15일 서울에서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安國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수송보통학교를 마친 뒤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김유정]]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였다.1926년때 부친의 사망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고 이듬해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는 『개벽(開闢)』지의 사원으로 입사 후, 약 10년간 창작 생활에 전념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발(髮)」이 3등으로 입선되어 작가 생활이 비롯되었는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목되었다.그는 예술파의 작가로 평판되었고 당대 일본 문단의 신흥예술파를 적극적으로 소개(新東亞, 1932.11.)하기도 하였다. 전기에는 신변, 가정사를 제재로 한 심리 추구가 주조를 이룬 「연기(煙氣)」(1933)·「명상(瞑想)」(1937) 등을 발표했다. 후기에는 거의 개인적인 주변의 일을 다룬 작품으로, 「소년과 기생」(1937)·「온실(溫室)」(1939) 등이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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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북구주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 귀국한 뒤,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활동하다가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장을 맡다가 월북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작품은 「폭풍(暴風)의 역사」(1947)와 「농민의 비애(悲哀)」(1948) 등으로 이를 통하여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다. 1947년 월북 후, 별로 뚜렷한 작품 활동이 없었고 문단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본래 프로문학 작가가 아니었던 그로서는 북한의 문학 이념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문필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는 1953년 [[임화]]가 숙청될 때 가까운 사이라 하여 곤욕을 치렀으며, 1960년대 중반에 결국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활동==
 
==작품활동==
  
 
==참고문헌==
 
==참고문헌==

2022년 6월 15일 (수) 17:17 판




생애

1909년 11월 15일 서울에서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安國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수송보통학교를 마친 뒤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김유정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였다.1926년때 부친의 사망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고 이듬해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는 『개벽(開闢)』지의 사원으로 입사 후, 약 10년간 창작 생활에 전념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발(髮)」이 3등으로 입선되어 작가 생활이 비롯되었는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목되었다.그는 예술파의 작가로 평판되었고 당대 일본 문단의 신흥예술파를 적극적으로 소개(新東亞, 1932.11.)하기도 하였다. 전기에는 신변, 가정사를 제재로 한 심리 추구가 주조를 이룬 「연기(煙氣)」(1933)·「명상(瞑想)」(1937) 등을 발표했다. 후기에는 거의 개인적인 주변의 일을 다룬 작품으로, 「소년과 기생」(1937)·「온실(溫室)」(1939) 등이 거론된다. 1944년 9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북구주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 귀국한 뒤,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활동하다가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장을 맡다가 월북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작품은 「폭풍(暴風)의 역사」(1947)와 「농민의 비애(悲哀)」(1948) 등으로 이를 통하여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다. 1947년 월북 후, 별로 뚜렷한 작품 활동이 없었고 문단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본래 프로문학 작가가 아니었던 그로서는 북한의 문학 이념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문필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는 1953년 임화가 숙청될 때 가까운 사이라 하여 곤욕을 치렀으며, 1960년대 중반에 결국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활동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