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 궁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덕수궁)
(이화학당)
149번째 줄: 149번째 줄:
  
 
파일:이화학당.jpg|300px| |'''이화학당(by 문화재청)'''<br/>[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29&gung_number=4&img_serial_number=288&imgGubun=1&language= 문화재청],<br/>'''공공누리 제1유형'''
 
파일:이화학당.jpg|300px| |'''이화학당(by 문화재청)'''<br/>[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29&gung_number=4&img_serial_number=288&imgGubun=1&language= 문화재청],<br/>'''공공누리 제1유형'''
파일이화학당의_저학년생들_1910년대.jpg|300px| |'''1910년대 이화학당의 모습'''<br/>[https://ko.wikipedia.org/wiki/이화학당#/media/파일:Lower_grade_girls,_Ewa_Haktang_school,_Seoul,_(s.d.)_(Taylor_box21num44b).jpg 위키백과],<br/>'''Public domain'''
+
파일:이화학당의_저학년생들_1910년대.jpg|300px| |'''1910년대 이화학당의 모습'''<br/>[https://ko.wikipedia.org/wiki/이화학당#/media/파일:Lower_grade_girls,_Ewa_Haktang_school,_Seoul,_(s.d.)_(Taylor_box21num44b).jpg 위키백과],<br/>'''Public domain'''
  
 
</gallery>
 
</gallery>

2019년 12월 2일 (월) 00:15 판

조선의 4대 궁궐

주제 선정 이유

팀 콘텐츠로 성북구의 문화재를 조사했었는데 성북구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조선시대 문화재가 우리 주위에 많이 남아있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과정 중에 떠오른 것이 궁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여 역사 유물이나 장소를 유적지를 보기 위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녔었다. 그 중 경복궁, 덕수궁 등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고궁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와 이름만 알 뿐 다른 정보들은 알고 있지 못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대다수 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서울에 위치한 조선의 4대 궁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주제로 선정하였다.




경복궁

경복궁 이야기

  •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처져, 왕도인 한양(서울)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구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의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 경복궁의 특징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광화문

광화문경복궁의 남문으로 현재 세종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정부청사 건물들이 쭉 늘어서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하게 광화문 앞은 의정부와 이조, 형조, 예조 등 육조 건물들이 들어섰던 관청거리였다. 조선의 신하들을 해치를 바라보며 오늘도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리라 다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광화문은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일제강점기에는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는 수모를 당하고 한국 전쟁 때는 포화를 맞았었다, 그러다 1968년 복원하였으나 목재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잘못된 위치에 세워지고 말았다. 다행히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광화문은 1867년 고종임금님이 중건 했을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 관련 영상

CC-BY,by 겨자씨mustard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근정전 앞에 두 개의 기단이 보이는데, 이것을 '월대'라고 한다. 이 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동물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임금님의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게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지붕 위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일행들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데 이것을 잡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기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쌍쌍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번성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근정전 기단 위에는 무쇠그릇이 놓여있는데 '드므'라고 불리며 화재를 막기위해 두었다.

경회루

경회루는조선의 누각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과거에는 현재의 모습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고 한다. 돌기둥마다 꿈틀대는 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270여년이 지난 고종임금님 때에 다시 지어졌다. 그때 화재로부터 경회루를 지켜달라는 의미로 청동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1997년 경회룽 연못 공사 과정중 물을 모두 뺏더니 청동용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용은 현재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양편에는 쇠를 먹어버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불가사리가 앉아 있는데 한 녀서의 코가 훼손되어있다. 마지막으로 경회루는 주로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많이 열리던 장소로 중국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무과시험도 펼쳐진 장소였다.

위치

덕수궁


덕수궁 이야기

  •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으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군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덕수궁의 특징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지은 연회와 휴식의 공간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정관헌을 자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정관헌이 서양 건축에 전통양식을 섞어 지은 전각이라면,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한문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으로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와 달리 1906년 이름을 고쳐 단 대한문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 대한문의 위치는 처음자리했던 곳이 아니다. 원래는 도로 앞쪽으로 33미터 남짓되는 곳이 자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태평로 길이 크게 뚫리면서 덕수궁 영역의 동쪽 부분이 크게 잠식당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또 다시 궁궐담장 뒤로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대한문만 홀로 서있게 되었다. 대안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이화학당

이화학당은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중 고등과정의 사립여자교육기관으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어렵게 한 여학생을 모집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차츰 정원이 늘었다고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조선시대 말 여학생들을 모집하여 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1887년 학생들이 7명으로 늘어나자 고종황제가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준다. 이화학당의 학생 구성은 개화지사의 자녀와 부인 등 소수의 상류계끕 출신과 서민자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화학당은 유교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말 여성교육과 남녀평등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성공회성당

위치

창덕궁


창덕궁 이야기

  •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 창덕궁의 특징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자연의 산세를 갈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따.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돈화문

인정전

부용정

위치

창경궁


창경궁 이야기

옥천교

팔각칠층석탑

앙부일구

위치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