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극 시기(1941~194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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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극 시기란 무엇인가?

일본이 만주 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통해 침략 전쟁을 확대한 일제가 한국의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한 간섭과 강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기로 특히 연극계 전체를 정책적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국민연극'이라는 친일어용의 슬로건을 내세운 시기를 말한다.

국민연극 시기에 일어난일

현대극장(1941)의 조직

이 시대에 모든 신극 단체들이 말살되었고 이를 두고만 볼수 없어서 서항석,유치진,함대훈,주영섭등이 모여 현대극장(1941)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현대극장(1941)에서 표방한 것은 '국민연극의 이론수립과 그 실천'이었다. 이는 일제가 연극계를 통해 이루어 내려던 목표와 부합한 것이다. 물론 조선 신극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였음 이었겠지만 그것을 위해 그들이 했던 이 활동은 친일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연극연구소 부설

현대극장(1941)의 조직과 함께 부설된 이 연구소는 '일본 정신' ,'일본사','일어'를 비롯하여 '예술개론 ','연극사', '연극개론','희곡론','연출론','배우술','무대미술'등을 수업과목으로 가르쳤는데 강사진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었으며 수강생을 공개 모집하여 연구소를 운영하였다. 여기서 강계식은 제1기 수강생으로, 이원경은 '무대미술'강사로, 함세덕은 수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연구소의 업무를 관할하는 실무담당 책인자로 관여하였다.

일제의 검열

1946년 6월에 한효가 쓴 '조선 희곡의 현상과 금후 방향','건설기의 조선 문학'에 따르면 희곡은 발표될 때 마다 검열을 거쳤고 이 후에 연극화 되려면 반드시 보안 경찰의 각본겸열을 받아야 되었다.또한 상연시에는 반드시 경관이 임석해야 했다.그리하여 이때의 모든 연극은 번안극이던 기존의 작품을 상연하는 것 이던 모든 상연이 친일적이 성격이 가미되게 되었다.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설립과 일제의 연극계 장악

1942년 7월 26일 조선연극협회조선연예협회가 통합하여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출범하였다. 회장은 일본인 가라지마가 임명되었고 이사장엔 서항석외 몇 명, 상임평엔 유치진외 몇명이 선출되었다.이 단체는 한국의 대부분의 연극단체들을 흡수하였는데 이는 당시 일제가 협회 외의 연극 단체에게는 상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협회의 회원은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나뉘었는데 정회원은 일정한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들이었고 준회원은 현회 산하 부설기관의 연구생들이었다. 협회는 정회원들에게 회원증을 발급하였고 또한 악사나 연기자등 기타 예능 보유자들에게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기예증을 발금하였다. 이 회원증과 기예증은 일정 기간 징용을 면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는 중요한 표징이었다. 덧붙이자면 기예증을 가진 여배우의 경우는 정신대에 강제로 동원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회원증을 가지고 있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영자잉 나왔고 회원증을 통해 재심사를 받게 될때 그동안의 행적들을 검사함으로 사실상 친일극을 연극계 전체에게 강요한 셈이다.

참고문헌

극작가 총서 3 함세덕편(노세운| 자유를 향한 동경에서 닫힌 현실로 page 7~ page 50)

저자:한국극예술학회 총서발간위원회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국민연극 시기(1941~1945.08.15) 함세덕 국민연극 시기에 함세덕이 활동 하였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최성훈 기여자: 양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