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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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오산고등학교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설립 및 역사

목표: 민족의식을 가진 실력 있는 인재를 길러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는 것

설립 및 역사
연도 설명
1907 이승훈이 민족교육을 위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4년제 중등 과정의 학교를 설립한 것이 현재 오산고등학교의 시초.
1909 8월 오산중학교로 정식 인가, 같은 해 12월 중학부와 소학부의 합부제로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임.
1919 3.1운동 당시 이승훈은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하다 투옥됨. 오산중학교 학생,졸업생 및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제 당국은 보복으로 교사를 불태우고 폐교시킴.
1920 김기홍(金起鴻) 등이 사재(私財)를 들여 교사를 신축하고 9월 다시 개교함.
1926 11월 5년제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음.
1930 5월에 이승훈의 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이 그의 민족교육을 기리기 위하여 학교 교정에 동상을 세움.
1934 화재로 본관이 전소되자 재건을 위해 당시 이사장인 김기홍과 교장 주기용(朱基瑢)이 헌신적으로 노력.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사회 후원과 협찬으로 근대식 교육시설을 신축함.
1942 일제는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을 투옥시키고, 일본인 교장을 세워 학교를 운영하였으나(민족의식을 말살) 학생들은 이에 맞서 격렬한 항일투쟁 전개.
1953 (광복 후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남하하여)4월 부산시 동구 동대신동에서 오산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가 같은 해에 서울 용산 원효로에 가교사를 짓고 이전함.
1956 4월 다시 서울 용산구 보광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1983 2월 남녀공학으로 전환
1990 남녀공학을 폐지하고 남학교로 복귀
1991 남강교육상을 제정해 제1회 남강교육상 시상식을 거행.
1999 남강기념관을 개관.
2007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
  •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짐.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 운동가들은 민족의식을 높이고, 실력을 길려 학교를 세우는 데 힘씀.
  • 학교에서는 수신, 역사, 지리 등과 같이 민족의식뿐만 아니라 과학 과목과 체육 과목을 두루 가르쳤다.
  • 다시 개교했을 무렵의 교원으로는 염상섭(廉尙燮)·김억(金億) 등 20여 명, 학생 수는 200여 명.
  • 동상을 세우고 1주일 뒤에 이승훈은 협심증으로 운명하였고, “유해를 생리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김.

과거 오산중학교 모습2 과거 오산중학교 모습1

교훈 및 교육목표

  • 교훈: 1926년 당시 교장이던 조만식(曺晩植)에 의해 ‘정직하고 결코 허언(虛言)을 하지 않는다. 근면하고 태타(怠惰)를 엄히 경계한다. 질소(質素)하고 조금도 부화(浮華)에 흐르지 않는다. 품성은 고결하고 의지는 견인(堅忍)하다. 사랑과 정성으로 자기 의무를 다하라.’로 제정되었다가, 1957년에 ‘사랑·정성·존경’으로 개정.
  • 교육목표: 사사교육(事事敎育)·처처교장(處處敎場)의 방법으로 애국애족정신·개척정신·사회봉사정신을 갖춘 밝고, 덕스럽고, 힘있는 인간 육성

관련 인물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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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네트워크 그래프

RDF

Domain(A) Range(B) 관계 설명
이승훈 오산중학교 설립하다 A가 B를 설립하다.
김소월 오산중학교 재학하다 A가 B에 재학하다.
김기홍 오산중학교 다시 개교하다 A가 B를 다시 개교하다.
김억 오산중학교 가르치다 A가 B에서 가르치다.
염상섭 오산중학교 가르치다 A가 B에서 가르치다.
조만식 오산중학교 교장이다 A가 B의 교장이다.
오산중학교 을사조약 간섭받다 A가 B에 간섭받다.
오산중학교 3.1운동 연관있다 A와 B가 연관있다.
오산중학교 만세운동 연관있다 A와 B가 연관있다.
오산중학교 항일투쟁 연관있다 A와 B가 연관있다.
오산중학교 용산구 보광동 위치해있다 A가 B에 위치해있다.

출처

작성자:박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