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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사상에서 발굴한 김소월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 8편을 목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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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2022년 6월 15일 (수) 04:19 판



개요

최린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78년 1월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주장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고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뒤늦게 참회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저명한 인물이다.

생애

젊은 시절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에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과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학자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901년부터 서울에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의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된 ‘활빈당’[活貧黨] 및 ‘일심회’[一心會] 등의 관계를 만들며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단체는 망명개화파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단체로 몇몇 인물은 대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지만, 최린은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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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괸련 미디어

[KBS 역사저널 그날] 민족대표 최린은 왜 변절자가 되었나ㅣ KBS 19111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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