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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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10일 (월) 10:57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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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개방했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북소문인 혜화문이 실질적인 북문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름 유래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북대문에는 智를 넣어 홍지문(弘智門 : 지혜를 넓게 한다는 의미)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대문은 홍지문 대신 숙청문, 숙정문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홍지문(弘智門)으로 지어졌다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또한 음(陰)을 상징하기 때문에 문을 열어두면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는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속설이 있어 폐쇄했다. 이 이야기는 조선 현종 때 실학자인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데, 상중하간지풍이란 “고대 중국 주나라 선혜왕 때 귀족들이 매우 음란하여 뽕나무밭에서 남녀가 밀회하였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녀자의 풍기문란행위를 뜻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6],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1.21 사태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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