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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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훈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4일 (목) 02: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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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1864~1953)은 정치, 독립운동, 예술, 언론 등등 많은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활동

정치/언론

대한제국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의 환국 때 김포공항을 방문하여 영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자 회장에 추대되었고, 전국애국단체총연협회 회장으로도 위촉되었다.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3]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독립운동

미국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손병희, 최린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예술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오세창체 또는 위창체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세창 권동진 A와 B는 친구다.
오세창 임규, 정인보, 한용운 A는 B와 미륵암에서 놀았다.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홍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