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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1일 (목) 16:02 판


사건명

개요

1910년 8월 29일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까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민족 수난기이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던 시기이다. 한용운이나 유관순 그리고 김구와 같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맞서싸운 사건이기도 하다.

상세항목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 놓였던 시기이다. 이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한 시대 중 하나로 정치적이나 외교적 동시에 독자적인 권한이 모두 박탈되었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는 제1 무단통치기, 제2 문화통치기 제3 민족말살통치기로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제1 무단통치기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다. 일본은 조선과 강제 합병을 한 직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1910년 헌병 경찰을 창설하고 무단 통치에 돌입한다. 즉, 일반 경찰의 행정을 헌병대가 담당하여 이에 결사는 물론 언론이나 집회 그리고 출판마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즉결 처분권을 갖게 되었다. 헌병 경찰들은 또한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이나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고 그럼에도 내각이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헌병 경찰은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관여함으로서 이 시기에 각종 한국인 단체가 해산당했다.


제2 문화통치기

1919년부터 1931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다. 대한민국이 3.1운동과 같은 강한 반발을 지속하자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는 기존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였으며 이에 조선총독부에 다른 총독을 파견하여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제한적으로 허가되었고 초등 교육이나 농업 교육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교육들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의 목표는 민생 안정이 아닌 회유책이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의 분열을 꾀하였다. 따라서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으나 결찰 수와 장비는 더욱 더 강화되어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민족 운동을 방해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를 통하여 소수의 친일 한인 관료들을 키우는 한편,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초급 학문과 농업 교육만을 갖고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 개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자치 운동 (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제3 민족말살통치기

1931년부터 1943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며 전진기지로 한반도를 선택하였다. 이에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국가총동원령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재개되고 미곡공출제가 시행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실시하였는데,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한반도를 더욱 수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만주사변중일전쟁에 동원할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했으며, 징용과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해갔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의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한편,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 등지에 보냈으며, 그 중 대부분을 중국과 남양지방의 최전선에 투입하여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 최근 들어 그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종군 위안부 문제를 간과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범죄 행위가 개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졌다는 데에 있다. 한국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하였는데, 학교의 한글 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A는 B에의해 광복했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