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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과 천도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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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반일 감정을 보이면서 [[대한제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최린은 [[일본 유학생회]]를 통해 ‘[[을사늑약]]’과 조선 유학생을 무시하는 교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1906년에 최린은 [[국화인형전시장]]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허리를 굽힌 조선왕의 인형이 전시된 것을 알고 학생들과 전시장에 인형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왕’을 일본민족인 [[화족]](和族)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자 유학생들과 학감을 방문하고, 문제학생의 퇴학을 요구하여 학교 측의 사죄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상의 사건들은 본국에도 알려진 일본유학생들의 대표적인 반일 활동이었다.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반일 감정을 보이면서 [[대한제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최린은 [[일본 유학생회]]를 통해 ‘[[을사늑약]]’과 조선 유학생을 무시하는 교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1906년에 최린은 [[국화인형전시장]]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허리를 굽힌 조선왕의 인형이 전시된 것을 알고 학생들과 전시장에 인형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왕’을 일본민족인 [[화족]](和族)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자 유학생들과 학감을 방문하고, 문제학생의 퇴학을 요구하여 학교 측의 사죄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상의 사건들은 본국에도 알려진 일본유학생들의 대표적인 반일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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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천도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최린이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와 만나게 되었다. 그가 [[손병희]]를 처음 만난 것은 [[일심회]][一心會] 활동을 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피해 일본에 건너간 1902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유학 생활을 하면서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병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병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린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1909년 9월 최린은 귀국 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일제강점기]]로 국가를 잃어 방황하던 자신의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활동을 기대할 수 있던 것은 종교활동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손병희]]와의 친분과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대, 천도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판단한 것이다. 1910년 10월 [[손병희]]를 찾아간 최린은 10월 25일 입교식을 통해 정식 [[천도교]]인이 되었고 이후, 최린은 [[천도교]]의 보성학교 인수를 성사시키고, 보성중학교와 보성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천도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최린이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와 만나게 되었다. 그가 [[손병희]]를 처음 만난 것은 [[일심회]][一心會] 활동을 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피해 일본에 건너간 1902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유학 생활을 하면서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병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병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린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1909년 9월 최린은 귀국 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일제강점기]]로 국가를 잃어 방황하던 자신의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활동을 기대할 수 있던 것은 종교활동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손병희]]와의 친분과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대, 천도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판단한 것이다. 1910년 10월 [[손병희]]를 찾아간 최린은 10월 25일 입교식을 통해 정식 [[천도교]]인이 되었고 이후, 최린은 [[천도교]]의 보성학교 인수를 성사시키고, 보성중학교와 보성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2022년 6월 15일 (수) 05:46 판


개요

최린은 일제강점기친일파,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78년 1월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주장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고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뒤늦게 참회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저명한 인물이다.

생애

젊은 시절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에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과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학자 도필두[都必斗]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901년부터 서울에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의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된 ‘활빈당’[活貧黨] 및 ‘일심회’[一心會] 등의 관계를 만들며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단체는 망명개화파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단체로 몇몇 인물은 대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지만, 최린은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최린이 근대학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중앙정치계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이 시작이었다. 최린은 1904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특별히 선발된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5년간 생활했다. 1904년 11월에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무학회[光武學會] 총대, 태극학회[太極學會] 총무원과 평의원, 대한학회[大韓學會] 회장, 대한홍학회[大韓興學會] 평의원과 부회장을 맡으며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최린은 일본 유학생들의 증가로 어지러운 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통합학회인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최린은 자신의 속한 서북지역 유학생의 학회인 태극학회를 탈퇴하고 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더하여 최린은 유학생들의 통합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지(同志)를 단합하여 천설만필(千舌萬筆)로 아(我) 신성민족(聖神民族)의 통일’을 이뤄야 할 책임이 있다.  -최린-

최린은 유학을 통해 반일적인 유학생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유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것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의 부흥을 위해 이바지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서로가 합심하면 독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많은 유학생과 국가와 민족의 단결을 통해 국가권력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의 주체적 여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린은 1909년 9월에 귀국하여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천도교단에서 인수한 보성학교 보성중학교에 1911년 2월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독립 운동과 천도교 활동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반일 감정을 보이면서 대한제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최린은 일본 유학생회를 통해 ‘을사늑약’과 조선 유학생을 무시하는 교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1906년에 최린은 국화인형전시장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허리를 굽힌 조선왕의 인형이 전시된 것을 알고 학생들과 전시장에 인형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에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왕’을 일본민족인 화족(和族)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자 유학생들과 학감을 방문하고, 문제학생의 퇴학을 요구하여 학교 측의 사죄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상의 사건들은 본국에도 알려진 일본유학생들의 대표적인 반일 활동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최린은 유학 시절부터 천도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최린이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와 만나게 되었다. 그가 손병희를 처음 만난 것은 일심회[一心會] 활동을 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피해 일본에 건너간 1902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유학 생활을 하면서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병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병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린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1909년 9월 최린은 귀국 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일제강점기로 국가를 잃어 방황하던 자신의 상황에서 그나마 사회활동을 기대할 수 있던 것은 종교활동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손병희와의 친분과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대, 천도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판단한 것이다. 1910년 10월 손병희를 찾아간 최린은 10월 25일 입교식을 통해 정식 천도교인이 되었고 이후, 최린은 천도교의 보성학교 인수를 성사시키고, 보성중학교와 보성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보성학교 교장으로 입지를 확보한 최린은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교단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했다. 최린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18년 말, 민족자결주의와 피식민지국가의 독립문제가 나타나자 교단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과 상의하여 한국의 자결을 위해 행정권을 확보하여 조선자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해주와 상해의 한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교주인 손병희의 동의도 얻어냈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했고 1919년 1월, 2월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작성, 발표, 인쇄, 시위계획, 대표선정 등의 작업에 모두 개입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협의를 주도한 것도 최린이었다. 그는 독립선언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고 경성 감옥에 수감 되었지만, 그의 위상은 천도교의 많은 영향을 미쳤고,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최린은 3년을 받았지만, 1921년 12월 총독의 정치 자문을 맡고 있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천도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필요한 신세력을 조직하는 데 최린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의 탈옥을 주선했다. 탈옥한 최린은 곧 천도교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고 천도교3·1운동 이후 일제의 오랜 탄압과 손병희의 사망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교인과 재정이 감소하면서 지도체제를 둘러싸고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1925년에는 천도교는 분열했다. 최린은 다수파인 신파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천도교 청년당, 조선농민사 등의 대중조직을 설립하여 조직기반을 장악했다.


변절과 친일 활동

최후

관련 사항

괸련 미디어

[KBS 역사저널 그날] 민족대표 최린은 왜 변절자가 되었나ㅣ KBS 19111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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