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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4일 (수) 15: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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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소개

민족의식을 시로 녹여낸 그 남자, 이상화 시인에 대해 알아보자


작가 소개

이상화

2022년 봄, 대구에는 꽃이 만개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돌아온 봄을 맞이하며 따듯함을 만끽한다.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고 약 100년 전인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봄을, 광복을 기다리던, 염원하던 이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우리는 지금 봄을 맞이하였는가. 1901년 5월 22일 대구에서 우리의 민족저항 시인이 출생하였다. 호는 무량, 상화, 백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상화이다.

이상화의 가족 '이장가'는 그의 생애에 있어 빼놓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훈도 밑에서 성장해왔는데, 그의 백부 이일우는 애국지사들을 양성해낸 민족 교육기관인 우현서루를 개관하고 계몽 운동 단체였던 대구 광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어머니인 김신자는 독립운동 추진을 위해 조직된 항일 여성 단체 애국 부인회의 회장을 맡으며 근대적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힘썼다. 형 이상정과 동생 이상백 모두 독립운동가로 ‘이장가’는 대구 근현대사 중심에 있던 집안이다. 짙은 민족성을 가진 그의 가정은 저항정신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다.

이상화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답게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1922년 문학청년들이 모여 발행한 문예 동인지 <백조>의 창간호로 등단하게 된다. 문단에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고, 동경에 있는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된다. 일본 유학은 중요한 대목이다. 이상화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게 된다. 일본의 무참한 학살을 본 그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저항적인 민족주의 시를 쓰게 된다.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계급주의적인 시의 면모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925년 무산계급을 위한 문예 운동 단체 파스큘라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카프와 같은 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 더욱 살펴볼 수 있다. 1926년 개벽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는 이상화가 생애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던 때이다.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힘을 썼고, 1943년 4월 25일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외침은 여전히 울리며 기억되고 있다.


다양한 작품에서 그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작품세계를 알기 위해선 당대의 배경 또한 중요하다. 1910년대 한일 강제 합병 이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였고 무단통치의 상황에 놓였다. 이후 3.1 운동과 4.11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문화정치라는 이름의 민족 분열 통치가 실행되는데, 지식인들을 비롯한 우리 민족은 어둠과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문단 상황으로는 서구의 다양한 문예 사조가 유입되었다. 낭만주의를 비롯하여 퇴폐주의, 감상주의, 허무주의 등 여러 사상이 수입되며 혼동이 일어났다. 또한 이 혼란 속에서 우리 문단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모방하던 시기이다.

이처럼 물밀듯 유입된 문예사조에 맞게 이상화는 1920년대 초기 관능적이고 낭만적인 문학을 선보였다. 이상화의 작품은 낭만주의 시로도 유명한데, 이는 ‘퇴폐적인’ 낭만주의이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상 세계를 동경하고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의미를 지닌다. 「말세의 희탄」에서는 절망과 슬픔을 과장하여 표현하였고, 어둠과 동굴 등의 이미지로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마찬가지로 「나의 침실로」에서 침실은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작품은 관능적인 표현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경향파적인 면모를 보였다. 역설적으로 경향파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발하여 생긴 사회주의 경향의 유파이다. 민족 해방을 목적으로 이전의 관념적이고 퇴폐적 낭만주의적인 현실 도피 경향을 띤 작품과 달리 현실주의의 문학이다. 이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작품 외에도 「가상」을 발표한 <개벽>은 사회주의 잡지로 이 시기 이상화의 경향파적 면모와 현실 참여적인 성격의 문학을 볼 수 있다. 그 이후로는 저항적이면서도 민족의 비애와 절망이 드러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초기 퇴폐적 낭만주의 작품으로 현실 도피적인 성격의 문학을 보였지만, 이들은 아름다운 시어들로 구성되어 높은 문학성을 띠는 작품들이다. 특히 이 시기에 쓰인 「나의 침실로」는 ‘마돈나’를 이상 세계 즉, 유토피아로 설정하여 퇴폐적이면서 감미롭고, 관능적이면서도 종교적인 표현을 주목할 만하다.일본 유학에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이후 20년대 중반부터는 현실의 삶 속에서 저항의 불을 피우는 작품을 노래했다. 계급문학과 같은 현실주의 근대시는 목적을 위해 문학을 사용하여 문학성이 낮다는 평이 있기도 한데, 이상화의 현실주의 시는 문학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또한 이상화는 순 한글을 통하여 시를 구성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이 난무하는 시기에도 초기 시에서부터 순 한글을 사용하며 모국어를 지켜내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상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저항을 부르짖었다. 일제가 민족주의에 대한 억압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와중에도 이상화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작품으로 절박한 민족정신을 본받을 수 있다. 그의 문학은 현대인들에게 민족정신과 저항정신을 전달한다.

이상화는 암흑기의 현실을 살아가며 그에 머물며 좌절하는 것이 아닌 시로서 외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문학인이라는 것이다. 문학으로 민족을 위해 울고 저항을 외치면서도 수없이 많은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을 위해 애썼다. 독립을 위해 운동하다 협박 받고, 고문 받고, 구금되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작품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삶, 탄압과 억압을 온몸으로 받고 느낀 삶을 문학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현실 그 자체였던 그의 문학으로 애달픈 감정과 민족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다. 그는 문단에서도, 현실에서도 우리 민족을 위해 발로 뛰었다.

이상화는 일제강점기 암흑기 시대에 저항이란 불꽃을 피워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