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전유미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6일 (일) 22:46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만보산 지역에서 한인농민과 중국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우리나라와 만주에 일본인을 이주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인의 한국 이민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불이흥업 등의 설립을 통한 농토의 침탈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농토를 잃은 대다수의 한인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 농민의 만주 이주를 일본인 이주의 전위로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렇듯 재만 한인이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이용되면서 재만 한인을 둘러싼 중일 양국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즉, 중국 동북 지방에 이주한 재만 한인을 누가 지배하느냐 하는 침략과 저항의 상반된 저의가 중일 양국의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이다. 1925년 일제는 중국 동북 지방의 한국 독립운동자 색출을 위해 중국과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라는 쌍방상정취체한인판법강요(雙方商定取締韓人辦法綱要)를 체결하였다. 한편, 재만한인을 일제의 침략 앞잡이로 인식한 중국은 이들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중국에 대한 두 개의 외교 노선이 대립하고 있었다. 불간섭주의 원칙을 고수하자는 시데하라(幣原喜重郎)와, 무력간섭주의로 중국 본토는 장개석(蔣介石)이 만주는 장쭤린(張作霖)이 나누어 갖도록 하려는 다나카(田中義一)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28년 다나카의 강경 외교는 관동군의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후퇴하면서 시데하라의 불간섭주의 외교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한편 1928년 12월말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동삼성(東三省) 총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조직적으로 배일 정책을 추진, 중국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그 결과 중일간의 현안 문제인 만철병행선·호로도 축항 문제 및 재만 한인의 토지 상조권 문제 등의 분쟁의 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대륙 침략 정책이 어려움에 처하자, 중국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자신들이 생명선이라고 부르던 이곳 만주에서 철수해야 하느냐,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행사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였다.

사건발생 및 결과

파일:만보산.jpg

만보산 위치

1931년에 중국 길림성 장춘현의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인 농민과 우리나라 농민 간에 수로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혈충돌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일제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제는 만주 지방으로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기에 이를 악의적으로 과장하여 보도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관계를 이간질시켰다. 이에 일제의 의도대로 국내에서는 화교에 대한 보복폭행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중국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보복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제의 한ㆍ중 이간책으로 재만동포들은 생존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관련콘텐츠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사실주의 최서해 영향을 미치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영향을 미치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다르다
사실주의 김동인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현진건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염상섭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이기영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채만식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카프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민중문학 관련이 있다
사실주의 민족문학 관련이 있다

네트워크그래프

참고문헌

시사상식사전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