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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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가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延州 玄氏)이고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다.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생애

출생과 가계

현진건은 광무(光武) 4년(1900년) 8월 9일(양력 9월 2일) 대구부(大邱府)에서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정효(貞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대구부 명치정(明治町) 2정목(町目),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의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융희(隆熙) 4년(1910년) 6월 13일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로는 홍건(鴻健), 석건(奭健), 정건(鼎健)의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홍건은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을 지냈고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정건은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현진건의 집안인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에 해당한다. 현진건의 6대조로 왜역(倭譯) 즉 일본어 통역관이었던 태형(泰衡)부터 한역(漢譯) 즉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5대조 상복(商福), 몽역(蒙譯) 즉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시석(時錫)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관으로서 활약하였였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유년기와 수학

여섯 살 되던 광무 10년(1906년)부터 마을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던 그는 2년 뒤인 융희 2년(1908년), 양아버지가 세운 대구노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6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동인지 발간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개벽지 동인 활동

1920년, 현진건은 양아버지 현보운의 동생 희운(僖運)의 소개로 11월, 문예지 『개벽(開闢)』에 「희생화(犧牲花)」를 개재하면서 처음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이보다 앞서 현진건은 『개벽』에 번역소설 「행복」(아르치바세프 원작)과 「석죽화」(쿠르트 뮌체르 원작)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의 자전적 성격도 동시에 가진 것으로 알려진 「희생화」는, 그러나 당시 문예평론가 황석우(黃錫禹)로부터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하등 예술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무명 산문"이라는 혹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1920년 11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1년 1월에 현진건은 다시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문단의 호평을 받아 11월에는 다시 『개벽』에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였고, 1922년 1월부터 4월까지 『개벽』에 중편소설 「타락자」를 발표하였다. 작품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상을 풍자하였다.

이 전해부터 휘문고등학교 출신의 젊은 문인인 박종화(朴鍾和) · 나빈(羅彬) · 홍사용(洪思容) · 이상화 ·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개벽』과 『백조』 두 잡지 사이를 오가며 『백조』 1호지에 수필 「영춘류(迎春柳)」, 2호지에 단편소설 「유린」을 발표하고, 또 기행문 「몽롱한 기억」을 기고하면서, 7월에 『개벽』에 다시 번안소설 「고향」(치리코프 원작)과 「가을의 하룻밤」(고르키 원작)을 각각 발표하였다.

비극의 30년대

형 현정건의 죽음과 복역

1930년 2월과 12월에는 장편 「웃는 포사」를 『신소설』과 『해방』에 연재하다 4회만에 중단하고, 1931년 10월에 단편 「서투른 도적」을 『삼천리』에, 11월에는 『신동아』에 「연애의 청산」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檀君)의 전승이 남아있는 안주(安州), 묘향산(妙香山), 평양, 황해도(黃海島), 강화도(江華島) 등지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단군 성적(聖跡) 순례」를 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11.9). 그러나 이 해,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6월 10일에 출소한 형 현정건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열흘 뒤인 12월 30일에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 형수(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도 자결하는 등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다(「적도」는 1934년 6월 17일에 완결되었다).

일장기 말소사건과 동아일보사 사직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말년

원고료에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기미(期米) 사업을 시작하지만, 1940년에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회사에 미두를 투자했다가 그것이 모두 실패하면서 양계장이나 다른 재산, 부암동에 있던 집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초가집(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 137번지 61호)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실패로 현진건은 더욱 술에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혈압' 때문에 쓰러져 눕게 되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만든 친일잡지인 『춘추』 4월호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하지만 9월호에서 중단하였다(미완).

1943년 3월 21일(양력 4월 25일) 밤, 지병이었던 폐결핵장결핵으로 경성부 제기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44세였다.(공교롭게도 현진건의 동향이자 문우였던 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위암으로 대구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현진건이 사망한 뒤에 그의 친아버지 현경운도 대구에서 사망하였고, 부인 이순득도 대구의 친정에서 사망하였다.

2005년 8월 15일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현진건문학상'이 제정되었다.

혈육 및 친척 관계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정건(鼎健)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관련 인물

관련 장소

  • 대구부 명치정 2정목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현진건 출생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5-2
지도를 불러오는 중...

현진건이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2003년에 철거되어 현재는 현진건 집 터라는 표석만이 남아있다.

  • 현진건 문학비

현진건문학비.jpeg[[4]]

현진건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작품

단편소설

중·장편소설

번안·번역소설

  • 행복〉(아르치바세프,《개벽》 3호, 1920.8)
  • 석죽화〉(뮌체르, 《개벽》4호, 1920.9)
  • 영춘류〉(치리코프,《개벽》25호, 1922.1)
  • 고향〉(치리코프,《개벽》25호, 1922.7)
  • 가을의 하룻밤〉(고르키, 《개벽》25호, 1922.7)
  • 나들이〉 (데카브, 《동명》31호, 1923.4)
  • 첫날밤〉(투르게네프, '시대일보', 1925.5.12~6.30.)
  • 도야지와 진주〉(르나르,《조선문단》14호, 1926.3)
  • 조국〉(제롬스키,《신동아》5~9호, 1932.3.~7.)
  • 재활〉(뒤마, 광한서림, 1938.)

소설·평론·기타

  • 몽롱한 기억
  • 6호 잡기
  • 이러쿵 저러쿵
  • 문인인상호기
  • 꿈에 본 신악양루기
  • 처녀작 발표 당시의 감상
  • 목도리의 복면
  •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
  • 조선문단과 나
  • 신춘 문단 소설평
  • 조선문단합평회
  • 물꽃 돋는 대로
  •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 신춘소설 만평
  • 소설 될뻔댁
  • 별건곤은 대중의 잡지
  • 교섭 없던 그림자
  • 여름과 맨발
  • 같 잖은 소설로 문제
  • 홍도화식 미인
  • 고도순례 경주
  • 사상의 로맨스
  • 애인와 안해
  • 내 소설과 모델
  • 첫 기고의 회상
  • 결혼제도 없는 사회
  • 단군성적순례
  • 거리에서 만난 여자
  • 금강산 정조
  • 신년 신계획
  • 장주와 프랑스
  • 문학종횡담
  • 역사소설문제

관련 콘텐츠

현진건문학상

현진건문학상 공모전은 1920년대 한국소설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빙허 현진건 선생의 문학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고자 마련하였다.

연극

  • 2011년 정의진 프로젝트에서 현진건의 고향을 연극으로 표현하였다.

고향 연극.png

고향 연극 포스터

  • 2013년 양손프로젝트는 '현진건 단편선 - 새빨간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연극 속 4개의 에피소드가 담긴 형식으로 연출하였다.

새빨간 얼굴 연극.jpeg

새빨간 얼굴 연극 리뷰

  • 2017년 대구문화재단에서 '낭독공연 근대소설 연극을 만나다 : B사감과 러브레터'를 진행하였다.

B사감과 러브레터 연극.jpeg

B사감과 러브레터 연극 정보

  • 2018년 극단느낌에서 '마누라'라는 이름으로 현진건의 작품인 빈처를 연극으로 각색하였다.

마누라 연극.jpeg

만화

  • 1981년 현진건의 단편소설인 을 방학기가 단편 만화로 그린 적 있다.

현진건 단편소설 - 방학기의 불

애니메이션

2014년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라는 제목으로 이효석, 현진건, 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엮어 만든 고전문학 옴니버스 형식의 애니메이션이 있다.

운수 좋은 날 애니.jpeg

관련 애니메이션 정보

관련 연구

  • WANG, XUE. "현진건 단편소설에 나타난 인물의 아이러니 연구." 학위논문(석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8 [[5]]
  • 박혜리. "현진건 단편소설의 남성인물 연구." 학위논문(석사), 한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8 [[6]]
  •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n.p.: 역락, 20080222. [[7]]
  • 호아죽. "현진건 초기 소설 연구 : 작가 의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학위논문(석사), 가천대학교 일반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전공, 2019. 2. [[8]]
  • 김혜원. "현진건의 역사소설 연구 :무영탑,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석사 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2005 [[9]]
  • 강경화. "현진건의 '적도' 재독". 성균어문연구 32, 1997 [[10]]
  • 김구중. "현진건 '고향'의 배경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 no.1, 1997 [[11]]
  • 문철주. "현진건의 '무영탑' 연구." 이사천두현교수 정년퇴직기념논문집. 일중사, 1991
  • 김종욱. "달라진 빙허의 '운수 좋은 날'." 문학사상 52, 1977. 1.
  • 장양수. "현진건 단편 '고향'의 항일문학적 성격." 한국문학논총 15. 한국문학회, 1994 [[12]]
  • 한상무. "현진건의 '국토순례기'의 이데올로기." 선청어문 23, 1995 [[13]]
  • 조남현. "현진건의 '무영탑', 그 미문주의의 허실." 새국어생활 10 no.3. 국립국어연구원, 2000 [[14]]
  • 조진기. "한국소설분석의 가능성 ㅡ 'B사감과 러브레터'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연구 9. 청구대학교, 1966
  • 최시한(숙명여자대학교). "인물 연구 방법의 모색 현진건의 『무영탑』을 예로." 대중서사연구 15 no.2 (2009.12): 147 - 174 (28 pages). [[1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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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DF
주어 목적어 서술어
현진건 대구 A는 B의 출신이다.
현진건 희생화 A는 B를 집필했다.
현진건 빈처 A는 B를 집필했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A는 B를 집필했다.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A는 B를 집필했다.
현진건 흑치상지 A는 B를 집필했다.
현진건 동아일보 A는 B의 소속이다.
현진건 백조 A는 B에 참여했다.
현진건 일장기말소사건 A는 B와 관련있다.
현진건 동아일보 A는 B의 소속이다.
현진건 현진건 문학비 A는 B로 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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