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나로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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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4일 (금) 14:19 판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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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0년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란 ‘민중속으로 가자’라는 러시아어로, 1874년 벌어진 러시아의 농촌계몽운동에서 동아일보가 이름만 따온것이다.

과정

1929년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한것을 시초로, 1931년 김성수, 송진우 등이 고령자, 장년층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취지의 농촌 계몽운동을 준비한 것이 시작이다.


  • 동아일보의 후원

학생 중심의 계몽운동은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브나로드’라는 슬로건을 걸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동아일보는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교재 출간, 계몽운동의 홍보, 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는 장편소설 을 연재하며 젋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브나로드 운동을 주제로 한 공모전을 열기도 하였다. 이 공모전에서 심훈상록수를 공모하여 당선되었다.


  • 운동 과정

브나로드 운동1.PNG

브나로드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학생계몽대는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였다. 이 당시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5,757명의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고 ‘계몽된’ 민중의 수는 4년간 98,598명에 달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계몽운동은 단순히 농민계몽 효과만을 얻은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계몽과 더불어 학생·농민의 민족 공동의식 성장과 식민통치하에서의 항일의식 고취, 인류애적 충동의 효과를 얻은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배화>지에 실린 이재덕의 글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열렬한 힘으로 민족에게 자각을 주려는 웅변가도 좋기는 좋다. 교육이 보급되지 않은 고로 그네들에게 사재(私財)를 기울여가며 가르쳐 주는 것도 좋기는 좋다. 인류의 행복을 위한 새 주의가 있으면 그것을 주장하는 것도 좋기는 좋다. 그러나 나로서는…… 농촌에 나아가서 봄ㆍ여름이면 오줌동이를 이고 텃밭에 나가며, 호미를 들고 밭으로 거며, 논밭을 매며 가을에는 조ㆍ벼를 다 추수해 들이며……


  • 일제의 탄압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 일제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는데 운동을 시작한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일제에 의해 강습이 중단된 횟수가 약 180회에 이르렀다. 일제의 감시의 거세지자 동아일보에서는 계몽운동에 나선 학생들에게 오해를 살 만한 이야기와 행동을 조심히 하며 오직 교육과 계몽에만 집중하라고 하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받아 조사를 받게된다. 하지만 혐의가 없어 곧 운동은 재게되었지만 동아일보의 후원 중단과 중심단체의 부재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38년 결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중지명령을 받아 운동은 중단되게 된다.

의의

문맹타파와 국문보급을 주축으로 하고 이와 아울러 위생사상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목적을 둔 일대 민중운동으로 언론계와 문화단체, 청년학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개하였던 거국적인 민족자강운동으로 평가된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에 있어 민중계몽을 통한 민족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언론계와 조선어학회·청년학생이 힘을 합쳐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주목할 만한 문화운동이었다.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 '민중적'이며 '민족적인'인 운동이라고 자체평가하였다.

하지만 최민지는 『일제하 민족언론사론』브나로드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에 대해서

  "우연이든 아니든 일제가 부르짖는 농촌진흥정책에 부응하여 문자보급, 농촌계몽 민중운동이라는 대간판을 걸고 독자망 확대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동아의 뛰어난 
   기업생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업"

이라고 평하며 브나로드 운동과 그 후원사인 동아일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중단되었지만 그 정신은 광복 후 대학생들의 농촌 봉사활동으로 계승된다.

한계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운동 수준만으로는 계몽운동을 전국적인 수준으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 떄문에 목표로 했던 문맹퇴치도 크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관련 영상

  • 상록수와 브나로드 운동, 심훈


  • 영상한국사 I 애국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물산장려운동

RDF표 및 온톨로지

항목A 항목B 관계
동아일보 후원했다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 이다 계몽운동
이광수 후원했다 브나로드 운동
김성수 참여했다 브나로드 운동
조선총독부 탄압했다 브나로드 운동

작성자 및 기여자

김도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수걸. (1990). 우리역사 바로알자 일제시기 브나로드운동, 재평가해야. 역사비평, (), 258-26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우사 조동걸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