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나로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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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0년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란 ‘민중속으로 가자’라는 러시아어로, 1874년 벌어진 러시아의 농촌계몽운동에서 동아일보가 이름만 따온것이다.

과정

배경과 시작

1929년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한것을 시초로, 1931년 김성수, 송진우 등이 고령자, 장년층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취지의 농촌 계몽운동을 준비한 것이 시작이다. 개방 후 근대교육이 도입된 이래 조선사회에는 그 필요성을 자각하고 향유하려는 욕구가 증대하고 있었다. 본래 교육은 민족공동체의 실력양성과 독립을 위한 대비수단이었으나, 1930년대 실익 추구가 중요시되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교육열은 제도권 교육에 대한 높은 수요를 형성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식민지교육체제는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정책적으로 수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교육기반시설의 부족과 고액의 수업료는 보통교육의 높은 진입장벽을 형성하며, 문맹문제의 심각성이 증대되는 요인이 되었다. 사회적 요구와 정책적 한계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된 문자보급운동은 교육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충족할 수 없었다. 교육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는 행위는 전 사회 구성원의 관심과 참여를 집중시킬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브나로드 운동이 등장하는 당위성을 제공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이 전개될 무렵의 1930년, 조선총독부의 현재 국세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국민 약 2천만명 중 1500만명이 문맹으로, 이는 전 국민의 75%에 이르는 수치였다. 동아일보는 시대적 상황에 맞춘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침체된 민족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1930년대 보통학교 진학률.PNG 문맹자 비율.PNG



동아일보의 후원

학생 중심의 계몽운동동아일보의 후원으로 ‘브나로드’라는 슬로건을 걸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동아일보는 1931년에 브나로드 운동을 시행하였다.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정치적 방면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민족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한 부문운동으로 설정되었다. 1930년대 동아일보는 정치운동의 시행을 보류하고 차선책으로 문화운동을 추진하였다. 문화운동의 목표는 대중의 역량을 강화하여 장래 민족운동과 정치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맹 퇴치는 필수 과업으로 설정되었다. 동아일보는 문화운동이 장기적으로 성공했을 때 민족운동의 장래를 전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런 점에서 동아일보에게 브나로드 운동은 궁극적으로 정치운동에 필요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경제적 방면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저조한 신문 판매율로 인한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당시 언론기관들이 처한 경영난의 원인은 빈약한 신문광고 수입과 독자층에 기인했다. 이에 언론기관들은 광고 수입과 구독자 수를 확대함으로써 경영난을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브나로드 운동은 문맹을 식자층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새로운 독자 시장을 개척한다는 영리적 의도를 내재했다. 이런 점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의 개량적 성격이 반영된 대중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동아일보는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교재 출간 및 배포, 계몽운동의 홍보, 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아일보사는 방학기간에 학생들을 모집한 뒤, 농촌에 내려보내 한글 교재를 무료로 나눠주며 한글강습 과 산수강습을 시켰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는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장편소설 을 연재하며 젋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브나로드 운동을 주제로 한 공모전을 열기도 하였다. 이 공모전에서 심훈은 충남 당진에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는 조카를 소재로 집필한 상록수를 공모하여 당선되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일보 또한 문자보급운동을 벌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운동 과정

브나로드 운동1.PNG 브나로드 운동 과정.PNG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PNG

브나로드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학생계몽대는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였다. 이들은 연필, 공책 같은 학용품을 나눠주거나 포스터를 게시하는 한편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며 강습생을 모집하였다. 이런 경로를 통해 일정한 사람이 모이면 계몽대원들은 동아일보에서 배부한 교재를 이용하여 한글과 숫자를 가르쳤다. 브나로드 운동은 본래 한글과 숫자만 가르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계몽대원들은 동화, 성경, 위생 등 다양한 과목을 포함시켰다. 이외에도 일본어, 중국어와 같은 외국어 과목이 교수되기도 했다. 강습 구성원에는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남녀, 노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주로 연령, 성별을 기준으로 분류되었는데 대체로 주간에는 아동과 부녀자, 야간에는 성인 남성이 강습을 받았다. 교육에 대한 열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고충을 부담하고서라도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가령,‘고열에 어린 애를 업고 매일 출석을 하는 부녀자’라든지, ‘잡초를 베다가 낫을 들고 글을 배우는 남자’라든지, ‘홍수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업고서 강습소에 데려다주는 모습'은 교육에 대한 열망에 의한 현상이었다. 고액의 수업료가 필요한 보통학교와 달리 브나로드 운동의 강습은 무상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몽대원들은‘일손을 뺏어간다'는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다. 또한 경비, 장소와 같은 물적 기반과 식민지 당국의 감시 등의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의 시행세력이었으나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교재 제공 외에 별다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 당국은 브나로드 운동의 시행을 희망하는 사람을 철저히 심문했고 인가가 없다는 이유로 강습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민족적 반감을 드러내는 계몽대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이 주축이 된 브나로드 운동은 지역사회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히 전개되었고 단순히 농민 계몽만의 효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효과를 불러왔다. 농민 계몽과 더불어 학생·농민의 민족 공동의식 성장과 식민통치하에서의 항일의식 고취, 인류애적 충동의 효과 또한 얻은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배화>지에 실린 이재덕의 글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열렬한 힘으로 민족에게 자각을 주려는 웅변가도 좋기는 좋다. 교육이 보급되지 않은 고로 그네들에게 사재(私財)를 기울여가며 가르쳐 주는 것도 좋기는 좋다. 인류의 행복을 위한 새 주의가 있으면 그것을 주장하는 것도 좋기는 좋다. 그러나 나로서는…… 농촌에 나아가서 봄ㆍ여름이면 오줌동이를 이고 텃밭에 나가며, 호미를 들고 밭으로 거며, 논밭을 매며 가을에는 조ㆍ벼를 다 추수해 들이며……

이 당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약 5,757명의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고 계몽된 민중의 수는 4년간 98,598명에 달했다. 비록 전체적으로 그 수를 보자면 전국민의 식자화라는 목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시 배움의 기회가 아예 없었던 농촌의 민중들에게 브나로드 운동은 교육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므로 그 성과를 폄하할수는 없다. 당시 계몽운동을 통해 글을 깨우친 어린 학생이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성과를 알 수 있다.

  『사장넘 진 상서. 매알 일기는 좋지 뭇하온대 사장념 기체가 평안하옵섭니까? 저희들은 사장님 덕택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사오니, 이 깊으신 은덕을 어쩌 다 말씀드리겠읍니까. 저희 공부하는 아이듣운 남자가 다섯 명이고, 여자가 다섯 명이니 모두 열 사람이 올시다. 매일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등불 밑에서 공부하고 있읍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닙, 불과 한 달도 뭇 되어 한끌을 다 배우고 산술도 제(除=나늦셈〕까지 다 배웠읍니다. 이렇게 많이 배우고 많이 아니 저희들의 기쁨온 물론이고 저희 부모들도 대단히 기빼합니다. 드럴 말씀은 많사오냐 이만 그치오며 내내 기체펑얀 하옵소서. 이 앞으로 더 많이 가르쳐 주섭시오. 아이들윤 올림,사장님 천, 배워 주는 선생 넙운 대동 상엽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 .!l

또한 브나로드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국내에서 브나로드 운동이 시행된 지역은 평안도(448건), 경기도(339건), 황해도(164건), 전라도(150건), 충청도(116건), 경상도(113건), 함경도(79건), 강원도(59건) 순으로 집계된다. 또한 1932년부터 만주(53건), 일본(18건), 중국(5건)과 같은 국외 지역에서도 브나로드 운동이 시행되었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브나로드 운동은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던 조선 농민들을 계몽시켜 그들을 근대적 사상을 갖춘 국민으로 교육시켰으며 이를 통해 조선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쟁취를 이루고자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운동의 종결

조선총독부는 브나로드 운동의 문제점으로 계몽대원들이 강습 중에 유포하는 민족적 불온언사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총독부의 입장에서 브나로드 운동을 비롯한 민간의 사설강습은 사회적 동요를 초래할 수 있는 주의·사상이 전파되는 통로로 간주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총독 우가키는 조선사회에서 고양된 민중운동이 식민지 통치체제에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소수의 유식·계급으로부터 다수의 학생, 노동자, 농민에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1930년대 초반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총독부에게 식민지 통치의 안정화는 더욱 중요한 책무가 되었다. 총독부는 철저한 감시·통제 정책을 통해 사회적 불안요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1934년 부터는 총독부에 의해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통제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아일보와 브나로드 운동은 193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받아 조사를 받게된다. 하지만 혐의가 없어 운동은 곧 재게되었지만 동아일보의 후원 중단과 중심단체의 부재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193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중지명령을 받아 운동은 중단되게 된다.

브나로드 운동 탄압.PNG

의의

브나로드 운동의 의의

브나로드 운동은 식민지지배정책의 변화와 민족운동의 소강상태가 시작되던 시점에 전개된 사실상 최후의 대중운동이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브나로드 운동은 국내 전체의 13개도와 국외 만주, 일본, 중국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망라하며 진행된 거대한 사회운동이었다. 운동 자체는 한글과 숫자를 보급하는 기초적 수준에 불과했으나, 1930년대에 범사회적으로 확대된 교육에 대한 갈망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긴밀히 결합하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런 점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특정 세력의 역량만으로 실현된 것이 아닌, 문자보급을 매개로 1930년대 전반 조선사회 저변에 존재한 교육에 대한 근본적 요구와 사회적 기반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브나로드 운동은 이전 시기의 문자보급운동보다 완성된 형태를 구현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문맹문제에 대한 사회적 위기의식은 다양한 세력의 역동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이런 점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민족적 운동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내재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은 불과 4년 만에 소멸되고 말았다. 이런 돌연한 사태는 브나로드 운동을 둘러싼 외부적·내부적 한계에 기인했다. 우선, 총독부의 존재는 브나로드 운동에게 큰 방해물이었다. 법적 근거를 이용한 무분별한 금지는 브나로드 운동을 제한시켰다. 또한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 차원의 구조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강력한 지원과 조직력이 뒷받침된 관제 운동과 경쟁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브나로드 운동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참여세력들이 함께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면 내부적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관변에 포섭되거나 책임을 회피하여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보전하고자 했다.


긍정적 평가

문맹타파와 국문보급을 주축으로 하고 이와 아울러 위생사상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목적을 둔 일대 민중운동으로 언론계와 문화단체, 청년학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개하였던 거국적인 민족자강운동으로 평가된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에 있어 민중계몽을 통한 민족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언론계와 조선어학회·청년학생이 힘을 합쳐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주목할 만한 문화운동이었다.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 민중적이며 민족적인 운동이라고 자체평가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중단되었지만 그 정신은 광복 후 대학생들의 농촌 봉사활동으로 계승된다.


브나로드 운동 결산.PNG 브나로드 운동 결산2.PNG


부정적 평가

하지만 최민지는 『일제하 민족언론사론』브나로드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에 대해서

  "우연이든 아니든 일제가 부르짖는 농촌진흥정책에 부응하여 문자보급, 농촌계몽 민중운동이라는 대간판을 걸고 독자망 확대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동아의 뛰어난 
   기업생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업"

이라고 평하며 브나로드 운동과 그 후원사인 동아일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브나로드 운동은 새로운 독자시장 개척을 통해 경영난 극복을 기도하려는 영리적·사업적 의도가 반영된 운동이며, 이런 점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 계열의 정치·경제적 ‘당면이익획득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또한 브나로드 운동이 총독부의 시정 방침에 부합하는 것임을 어필하였는데 이는 브나로드 운동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책임을 전가되는것을 회피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다음의 1932년 이광수가 발표한「실지운동의 다섯 가지 주의」를 통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지방에 있는 동지들과 협력할 것, 한글과 숫자 외에는 아무 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지방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얻은 후에 시행할 것, 본 운동은 동포에 대한 봉사로서 민중정신의 기초가 되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 건강에 주의할 것’ 등을 권고했다.

특히 이중에서 한글과 숫자를 가르치는 것 외에 사상적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언행을 자제할 것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이는 동아일보가 진정 애국적인 목적을 가지고 실력양성을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운동을 후원했다는 의심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사회 각 계층의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함으로써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의 예상을 벗어나 광범위한 대중적 계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계

국가, 민족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만으로는 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또한 비협조적인 일제 당국의 태도와 동아일보의 미진한 태도 등의 어려움은 브나로드 운동이 민족적인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기간에 종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목표로 했던 농촌의 문맹퇴치, 근대교육 전파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새로운 독자시장 개척을 통해 경영난 극복을 기도하려는 영리적·사업적 의도가 반영된 운동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의 정치·경제적 ‘당면이익획득운동’의 일환이었다. 또한 브나로드 운동이 일제의 농촌교육사업,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일제조선지배에 협조했다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관련 영상

  • 상록수와 브나로드 운동, 심훈


  • 영상한국사 I 애국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물산장려운동

RDF표 및 온톨로지

항목A 항목B 관계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 A는 B를 후원했다
브나로드 운동 계몽운동 A는 B이다
이광수 브나로드 운동 A는 B를 후원했다
김성수 브나로드 운동 A는 B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브나로드 운동 A는 B를 탄압했다
심훈 브나로드 운동 A는 B에 참여했다
심훈 상록수 A는 B를 썼다
농촌활동 브나로드 운동 A는 B가 계승했다
이광수 동아일보 A는 B에 속해있다
이광수 A는 B를 썼다
문자보급운동 계몽운동 A는 B이다

브나로드 운동 온톨로지 수정.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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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김도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수걸. (1990). 우리역사 바로알자 일제시기 브나로드운동, 재평가해야. 역사비평, (), 258-26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우사 조동걸 전집

정준희. (2018). 1930년대 브나로드 운동의 사회적 기반과 전개과정. 석사 학위논문. 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