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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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우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5일 (토) 04:04 판 (R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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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물산 장려회를 모태로 하며 1927년 2월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이다.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하여 서울에 창립한 민족 운동단체이다. 하지만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분란을 겪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한다.

배경

중국에서 민족주의 단체국민당사회주의 단체공산당1차 국공합작(쑨원과 마오)을 맺게 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 세계 코민테른 협회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선 사회주의민족주의의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반도에서 조선 민흥회가 결성되고 정우회 선언(1926년 11월)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가 합작해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했고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가 결합하여 신간회가 탄생하였다.

전개

년도 항목 내용
1926 조선민흥회 배경으로 가장 먼저 연합이 된 단체가 조선민흥회이다.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조선물산장려회'가 사회주의 세력인 '서울청년회'와 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훗날 조선민흥회 회원 전원이 신간회에 참여하게 된다.
1926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 국공합작이 중국에서 일어나자, 충격을 받은 안창호가 우리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북경에 있던 좌익세력 대표 원세훈을 만나 '일대혁명당'의 설립을 논의하였다. 그 논의가 한국 독립유일당 북경 촉성회이다.
1926 정우회 선언 신간회의 탄생 배경과 연관이 깊다. 사회주의 세력들 사이에서도 통합과 연대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분립에서 통일로' 라는 기치하에 서울에 위치한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 이렇게 4개의 사회주의 단체가 합쳐진 게 정우회이다.
1927 신간회 창립 정우회가 선언을 하고 조선민흥회에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진행하자고 제안하였다. 조선민흥회도 통합과 연대가 된 단체이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며 신간회가 창립하게 된다.

상세소개

신간회 강령

신간회 강령 (출처:[1]

1. 우리는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신간회 투쟁 목표

•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모든 법령 철폐

•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 부당한 납세 반대

• 산업 정책을 조선인 본위로

• 단결권, 파업권, 단체 계약권의 확립

• 경작권의 확립

• 8시간 노동제 실시

• 최저 임금, 최저 봉급제 실시

• 모든 학교 교육을 조선인 본위로 - 신간회 동경 지회의 정책 제안(일부)

신간회 활동

대표적인 활동으로 민족적, 경제적, 정치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원

광주 학생운동 관련 신문 (출처:[2]

광주학생운동 당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학생 시위를 지원하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광주실정보고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였지만 사전 발각되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44명의 간부와 총 90여명이 구속되었다.

*순회강연단 조직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로 민족의식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비판하였다. 민족 당면 과제로 경작권의 확보, 일본인의 이민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협동 조합 운동 전개,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획등 등을 제시하였다. 외에도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 화전민 항일운동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수재만 구호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경제수호운동

신간회는 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를 주장하고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원산총파업 지원

신간회는 노동, 농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대표적으로 원산총파업을 적극 지원하며 최저임금제 등을 주장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26년 6월 10일 순종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결사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의 성립 요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4년 전후로 널리 퍼진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표적인 기관이 만들어져 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바랐다.

둘째, 국내 사회주의 진영6·10만세를 고비로 활동이 점차 퇴보하자, 다시 한 번 일어설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민족주의 진영에게 좌우 합작으로 민족 유일당을 성립하자고 제의하였다.

셋째, 일제는 민족·사회주의 진영의 동태 파악과 계보 활동을 예의 추적, 구금하기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 주었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규약은 25개조로 되어 있는데,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였다. 활동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 뒤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 등과 통합을 추진, 이상재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위원으로 뽑았다. 창립총회에서 35인을 선출해 간사회를 소집,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이용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 본부의 회장단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 사회·공산주의계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죽자 부회장 권동진이 그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하였다.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 대회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그 동안 기선을 제압당했던 사회·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그 골자는 간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집행위원제로 중앙의 권한을 학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을 먼저 천명한 뒤,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의 방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해,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의의 및 한계

의의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함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한계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이유로 일제 당국의 탄압 하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신간회는 지도부마저 일제와 타협하려는 소위 '민족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자 비타협적 반일 민족 연합 전선체로서의 신간회 노선은 더욱 계급 중심의 노선을 조장하고 있었다. 이후 신간회는 '타협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계와 민족주의계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때문에 신간회는 일제로부터 탄압받아 해산된것이 아닌 좌우 내부 분열에 의해 해산되었다는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관련인물

신간회 관련인물 (출처:[3]

신간회를 대표하는 인물은 설립자 홍명희 신채호 등 34명과 활동인원 약 3만 9000여 명으로 구성된다. 회장은 이상재 부회장은 권동진 이다

설립자

홍명희,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백관수, 신석우, 유억겸, 권동진, 조병옥, 송진우 등 34명

관련 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신간회 그래프.PNG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간회 정우회선언 B가 A에게 영향을 미치다.
신간회 홍명희, 신채호 등 34명 B가 A를 설립하다.
신간회 서울 A가 B에 위치한다
신간회 좌우익세력 A가 B를 합치다.
신간회 반일사회운동 A는 B 이다
신간회 지회 A가 B를 설치하다
지회 일본, 서울 등 전국 A는 B에 위치한다
신간회 타협주의 A가 B를 배격하다.
신간회 기회주의 A가 B를 배격하다.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A가 B를 모태로하다.
신간회 광주학생 항일운동 A가 B를 지원하다.
광주학생 항일운동 진상조사단 A가 B를 파견하다.
광주학생 항일운동 광주실정 보고 민중대회 A가 B를 시도하다.
신간회 원산 총파업 A가 B를 지원하다.
신간회 순회강연단 A가 B를 조직하다.
순회강연단 갑산 화전민 항일운동 A가 B를 지원하다.
순회강연단 수재민 구호활동 A가 B를 지원하다.
순회강연단 민족의식, 항일의식 A가 B를 고취시키다
신간회 경제수호운동 A가 B를 활동했다.
신간회 합법적 항일운동단체 A는 B이다.

참고문헌

『신간회연구』(이균영, 역사비평사, 1993)

「신간회운동」(송건호, 『한』79, 1978)

「신간회의 조직과 항쟁」(이현희, 『사총』15·16, 1971)

「신간회의 사회교화」(이문원, 『한국학』26, 1982)

「신간회의 창립에 대하여」(이균영, 『한국사연구)』37, 1982)

기여자

권서영분류신석:권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