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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6일 (금) 23:02 판


생애

개요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아주이다.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때 가족 어르신들 이야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라는 장소에 가게 된다. 이때 본 목계의 풍경을 공책 그 자리에서 종이공책에 남기는데, 당시 초등학교 선생의 눈에 띄게 되어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신경림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에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한국전쟁 속에 피난살이를 하던 신경림의 가족은 9.28수복 후에 다시 집을 찾았지만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을 발견하고 인민군들을 피해 그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 근처의 산 속에 숨어 지냈다. 이 과정 중 신경림은 사람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악몽에 시달리다 나중에 이 일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탄생한 시가 폐광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신경림은 이전과 달리 학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의 문제 학생으로 찍히게 된다. 이 시기에 당시국어 선생님이었던 유촌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신경림에게 벌을 주는 대신 시 다섯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이를 계기로 유촌 선생님의 아들 유종호를 만나게 되고 유종호는 훗날 신경림의 든든한 지원자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버는데 있어서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1956년 이한직의 추천으로 신경림은 처음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문예지인 문학예술에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갈대를 문단에 발표하며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신경림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검되는 일을 겪으면서 신경림은 충격을 받았고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떠올라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을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1950년대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영월, 문경 등의 각지를 떨도며 광부, 농사꾼,장사꾼 생활을 하며 시와 문학 서적에 대한 모든 연을 끊었다.

그러다 서른 즈음, 결혼할 무렵이 되었을 때 신경림,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시를 쓰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시 쓰는데 집중을 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 신경림은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 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게 된다.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농무도 이 가운데 한 작품이었다. 민중적인 화자를 통하여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는 점이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된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농무로 이름을 아린 후 1970년에는 거듭된 불운으로 힘든 하루하루르 지냈다. 아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두 달동안 갇혀있다가 풀려나게 되었다.

그 이후 1984년에는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의원,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등의 중요 직책을 맡았다. 1984년에는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화운동차원으로 발전시켰다. 1985년에는 통일을 노래한 '달넘세'를 내놓고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내게 된다. 신경림은 이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대한 관심이 많아져 시 창작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고 현재는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자리에서 지금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일 하고 있다.

경력

1984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고문
1985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2001 화해와 전진포럼 상임운영위원
2004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